*며칠 전 강의에서 했던 말과 덧붙이는 말*
인터넷을 일상으로 경험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아 개념과 그렇지 않았던 시대부터 살았던 사람의 자아 개념은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지만, 어쩌면 자아까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상황에선 자아 개념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거죠.
이를테면 며칠 전 이곳에도 올린 구글글래스 영상을 보며 전 열광했습니다. 그러며 안경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던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몸 경험을 완전히 다르게 구성하겠죠. 스마트폰이 삶의 경험을 완전히 다르게 바꿨듯. 이렇게 고민한 계기는 스마트TV가 나왔을 때 발생한 논쟁 때문입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스마트TV에 회의적이었습니다. TV란 가장 게으른 기기고 그래서 리모콘에 무수하게 많은 자판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을 거란 주장이었죠. 실제 구글TV가 나왔을 때 관건 혹은 쟁점 중 하나는 리모콘이었습니다. 소수는 스마트TV의 미래를 밝게 봤습니다. 한 엔지니어는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자신의 어린 아이가 TV를 보다가 갑자기 TV 주변에서 무언가를 찾더라고 합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아이에게 물으니, 키보드와 마우스가 어딨냐고 물었다네요. 이것은 컴퓨터 사용에 익숙한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몸을 구성한다는 걸 알려주죠.
(이와 관련해서 <인 더 플렉스In the Plex>란 책에서도 재밌는 얘기를 합니다. 저자는 구글과 여타 기존 대기업의 충돌을, 인터넷을 당연하게 사용한 세대가 중심인 구글 구성원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이 중심인 다른 기업의 충돌로 이야기하기도 했죠. 일견 그럴 듯했습니다.)
비슷하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가장 개인화된 기기지만 가장 공적 기기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은 철저하게 개인의 사용 경험에 맞춰 설정되어 있기에 나의 사용 경험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스마트폰으로, 태블릿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주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그냥 보이거든요. 그리하여 나의 사적 경험은 공적 전시기도 합니다. 이럴 때 공사 구분은 (원래도 의미가 없었지만)정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프라이버시 자체도 달리 고민해야 하고요.
이 정도는 약과죠.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임신 상태일 때부터 자신을 전시합니다.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은 부모의 기쁨, 자랑 속에 전시되죠. 초음파로 찍은 모습부터 출산 직후, 기어다니는 모습, 처음 웃는 모습, 걸어다니는 모습.. 인터넷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자신의 일상이 웹에 저장되고 유통됩니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호감을 느껴 작정하고 과거를 추적한다면, 엄마 혹은 아빠의 몸 속에 있던 모습부터 다 확인할 수도 있겠죠.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매우 끔찍하게 느끼겠죠. 하지만 태어나기 전부터의 모습이 웹에 전시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태어난 이들이게, 이것은 어떤 경험일까요? 자신의 일생을 검색할 수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세대의 자아는 그렇지 않은 세대와는 매우 다를 듯합니다. 이럴 때 프라이버시와 자아는 지금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달라야 하고요.
시간이 지날 수록 이와 관련한 많은 얘기가 나오겠죠? 어떤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피는 것도 흥미로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