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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아는 부계혈연친척들과 모르는 부계혈연친척들은 있기 마련이다. 친척, 친척, 가족, 가족, 혈연, 혈연 하고 떠들지만 속사정을 모두 알고 지내는 건 아니다. 아니 일 년에 두 번, 명절에나 만나면 그나마 많이 만나는 편이고, 몇 년 동안 만나는 일 없이 지내기도 하니, 친척이니 가족이니 혈연이니 하는 말들, 모두 허구일 뿐이다. 또한 삼촌의 이런 상황을 안다고 해도, 알지만 삼촌을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의 부계혈연친척과, 항상 치를 떠는 부계혈연친척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혈연이라는 허구는 무서울 때가 많다. 삼촌이 혈연이라는 이유로, 단지 그 이유로 삼촌 편을 드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때면, 혈연의 무게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무서움을 낯설고도 새삼스럽게 느낀다.
전화를 받고, 슬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그렇구나’하는 정도랄까. 그 이상의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쾌활한 척 하려고 했고, 이 죽음에 웃음소리를 붙이려고 했다. 당혹스럽게도 쉽진 않았다. 그냥, 계속해서 먹먹했다. 슬픈 건 아닌데,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건 부계혈연이라는 어떤 가족주의의 무게도 아니고, 그 동안 알고 지낸 사람의 죽음이 따른 인연의 힘도 아니었다. 다른 혈연의 죽음은 대부분 꿈을 비롯한 여러 형태로 짐작했는데, 삼촌의 죽음은 꿈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우선은 종시가 급했으니, 당일 안 내려가고 금요일에 내려가기로 했다. 문제를 받으면 이틀 후 보고서를 제출하는 마지막 종시. 보고서는 서둘러 마무리했다. 아무렇지 않고 싶은데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엄마님의 말처럼 이 죽음이 아니라 다른 두 사람이 걸렸기 때문이다. 만약 삼촌이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이었다면, 내려갔을까? 조금 의심스럽다. 그랬다. 소식을 듣고 내려가야겠다고 다짐한 건, 소식을 듣기 전부터 꼭 내려가야겠다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망자가 아니라 산자 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먹먹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먼 친척들과 함께 내려가는 동안(같이 가고 싶지 않았지만, 기차표를 할인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누구도 이 죽음을 얘기하지 않았다. 슬퍼하는 표정도 없었다. 죽음은 그런 거다. 무례하게도 기차역으로 가는 동안엔, 죽음은 민폐라는 말도 중얼거렸다. 하지만 죽음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는 역할도 한다. 죽은 자가 살아생전에 남긴 흔적들이 모여드는 곳이 영안실이고 장례식장이라고, 중얼거렸다.
숙모와 사촌동생의 표정은 미묘했다. 숙모의 표정이 더 복잡했다. 더 신경 쓰였다. 놀랍고 경악스럽게도 병원 장례식장엔 숙모가 “미망인”으로 올라와 있었다. 결혼이 무슨 천역이라고, 숙모는 “미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숙모였지만, 그래도 종종 울기도 했다. 그 울음이 슬픔의 표현인지 맺힌 한의 표현인지 모호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긴 어려웠다. 생전에 만난 적 없지만, 삼촌과 친형제처럼 지냈다고 말한 조문객이, 삼촌에게서 숙모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을 했을 때, 숙모는 기분이 더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통해 사촌동생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런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소식과 평가를 전해 듣는 감정은 어땠을까. 사촌동생도 집요하게 울지 않았다. 그냥 종종 멍하니 있었다. 조금 쓸쓸한 분위기였다. 사촌동생과 삼촌이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사촌동생은 “그래도 아버지”라고 어떻게든 챙기려는 입장이었지만, 다른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울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종 나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이건 망자를 애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슬픔을 부추겼다. 내 몸에서 번지는 슬픔은 누구를 애도하고 있는 걸까.
화장하러 가서도 비슷했다. 그곳엔 슬픔이 넘쳐흘렀고, 울음이 넘실거렸다. 그 속에서 돈거래가 오가고 밀약과 음모가 오가기도 했다. 숙모는 종종 울었고,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진행 상황에 신경을 썼다. 사촌동생은 자리를 피했고, 경직된 표정이었다. 유골을 수습하는 화면을 보며, 결국 사촌동생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저 몸이 경직되어서,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표정이었던가. 서서히 실감하는 표정이었을까. 어쩌면 이렇게 그렁그렁 고인 눈물, 하지만 결코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이 사촌동생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남성역할”이라고 불리는 성역할을 중시하는 편이니까. 그러니 사촌동생은 자신의 방식으로 최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골을 수습하는 화면을 마주하며, 사촌동생이 간신히 서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골을 곱게 갈고 항아리에 담는 곳에선, 울음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애달프게 울던 몇몇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에 소리 내어 곡을 하는 사람도, 소리 내어 우는 사람도 없었다. 동생의 죽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던 아빠님도 망연자실한 표정만 지었고, 사촌동생과 숙모는 경직된 몸이었다.
이 죽음을 쓰는 건 쉬울 거라고 믿었다. 망자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쉬웠을 지도 모른다(장담할 수는 없다, 쉬울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은 두 사람. 오랫동안 삼촌과 같이 살지 않았고 그래서 생활방식 자체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지만, 어떤 형태로건 이 죽음이 두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고민하면, 이 글은 쉽지가 않다. 자꾸 먹먹하다. 죽은 사람을, 살아가는 사람을 애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글은 또 누구를 애도하는 글일까. 나 자신을 애도하는 글일까. 쉽게 부정할 수 없다.
화면 속에서 화장을 하는 모습, 유골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는 내내, 떠올린 건 숙모와 사촌동생이었다. 이 두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든 추스를 수 있게 하고 싶었지만, 이럴 능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옆에 앉아 자리를 지키기만 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깊은 잠에 빠졌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화장장에서 화장이 끝나길 기다리며 기구한 인연을 만났다. 루인의 일행이 앉아있던 앞자리에서 자신들 어머니의 화장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루인에게 알은체 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25년 전 첫 직장에 다녔을 때, 삼촌과 같이 일한 사이라고 했다. 사진을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이름을 확인하곤 확신했다고. 만나려면 또 이렇게 만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죽은 자를 기리는 장례식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산 자’를 위한 의식이죠..
슬픔도..눈물도…정적도…
전, 작년에 어머니 장례식을 겪었는데..
‘죽을 때’의 순간보다..
죽기 까지의 과정..
그리고..
죽은 후의 과정..
그게…더,
감정적인 나날들이었더라구요.
정말 그래요.
산자를 위한 의식이면서, 그 당일보다도 그 전후의 시간들이 더 무겁게 다가오더라고요.
죽음이 당연한건데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죠.
(또 딴소리)
그러게요.
정말 당연한 일이라고 덤덤하려고 해도, 덤덤하기가 힘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