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어느 날 그 길에서] 2008.03.28. 금. 14:40, 하이퍼텍 나다, 나열-046

01
다큐에 따르면 한국엔 1제곱킬로미터 당 1킬로미터의 도로가 있다고 한다. 즉, 가로 세로 1킬로미터인 땅에 가면 어쨌거나 도로를 가로질러 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굳이 이런 통계가 아니어도 내가 사는 동네는 자동차도로가 없는 곳이 없다. 자동차가 한 대라도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곳이면 어김없이 자동차가 다닌다. 자동차가 일상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삶. 예전에 법과 관련한 수업을 들을 때였다. 자동차 사고가 별로 없던 초기엔, 자동차가 사람을 치면 100% 자동차 운전자 과실이었는데, 요즘은 자동차를 조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운다고 한다. 판사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이 늘었기 때문이다.

한땐 이력서를 쓸 때, 운전면허증이 자격증의 하나로 기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쓰지 않는다고 한다. 운전면허증은 특별한 자격증이 아니라 필수품 혹은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아직도 운전면허증이 없고, 앞으로도 취득할 의향이 없다. 내가 차를 운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자동차는 기본적으로 살인도구라고 믿는 편이다.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다보면 차 사고를 당할 뻔 한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마다 화를 내는 사람은 운전자이다. 정말 화가 나는 사람은 나여야 하는데, 마치 내가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 마냥 화를 내는 운전자가 많다. 그러니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잘 살펴야 한다. 느긋하게 걷거나 산책하기 위해선 별도의 공간으로 찾아가야 하고. 쉬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하듯, 쉬기 위해선 별도의 다른 공간으로 가야 한다. 결국, 쉴 만한 곳은 없다.

02
지리산과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120킬로미터 거리의 도로. 그 도로에서 30개월 동안 로드킬로 죽는 생명을 조사했더니, 거의 6,000건에 달하더라고 한다. 한 달에 얼추 200건, 하루에 6건. 많은 날은 단지 몇 십 미터 거리에서 하루동안 70여 건의 로드킬이 발생했다. 연구자들은 로드킬이 발생하는 특별한 조건이 있을 거라 가정하고 로드킬이 발생한 지역의 다양한 조건들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하지만 30개월이 지났을 때, 6,000여 건의 로드킬이 발생한 곳을 표시한 점들은 정확하게 120킬로미터의 거리와 일치했다. 즉, 로드킬이 자주 발생하는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게 아니라, 도로가 있고 자동차가 지나가면 언제 어디서든 로드킬이 발생한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에겐 도로가 지나가는 길이지만, 그래서 지역을 이동하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이지만,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도로는 생태계의 파괴이며 생존공간의 침해이다. 산에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희귀종들을, 로드킬로 죽은 상태에서 만났다는 감독의 말…. 결국 도로와 자동차는 무차별적인 살해도구와 같다.

03
어떻게 하면 인간과 비인간들이 함께 조화롭게 살 것인가, 라는 감독의 질문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개발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다큐를 읽는 내내 괴로웠다. 그렇다고 동물들을 주어의 자리에 놓고 싶다는 감독의 고민이 성공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건 애당초 불가능한 기획이니까. 감독은 감독이 읽어내려는 동물의 모습으로 다큐에서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사소한 문제일 테다. 다큐와 영화, 픽션과 논픽션의 차이가 무의미한 걸.
(하지만 무덤을 만드는 건 좀 웃겼다.)

무엇보다 이 다큐영화는 빼어나다. 편집의 묘미도 잘 살리고,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장도 분명하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개발경제를 비판하는 사람들, 환경이나 생태이슈에 관심 있는 사람들, 자동차가 불편한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이 다큐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6 thoughts on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

  1. 음……. 그 영화, 보고 싶었는데,
    나름 재미있고 의밍ㅆ었나 봐요..?ㅎ
    조금 오래하면 볼 수 있을 텐데..ㅠ-ㅠ

    1. 이제 개봉했으니 오래하지 않을까요? ;;
      정말 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다큐영화예요. 잘 만들었고, 재미도 있었고요. 시간이 되시면 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헤헤

  2. 운전면허증은, 이력서에 쓰진 않아도 면접 볼 때 물어보더라구요.
    안 물어봤을 경우엔,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저도 운전면허증 따고 싶지 않아요.
    (주변의 압박으로 언젠가는 딸지도..)
    이유는 루인님이랑 비슷한 거 같아요.
    추가적 이유로 차를 사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과 좁은 땅에 차 한대 더 늘려서 환경오염에 일조하지는 말아야겟다는 것이 있죠.

    1. 안 물어보면 당연히 있는 줄 안다니, 그럼 없다고 고백이라도 해야 할까요? 흑흑흑
      미즈키님 말처럼, 정말 자동차는 운전하고 싶지 않아요. 대중교통만으로도 넘치잖아요.

    2. 운전면허증 없다는 것도 일종의 커밍아웃? ㅋㅋ
      자동차가 살인 도구라는 말에 동감해요. 전 가끔 운전을 하지만 엄마를 위해서 하는 거지, 저 혼자 어디 갈 때 운전하는 건 싫어해요. 내가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 있다는 점에서 총을 들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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