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시브룩 지음, 김윤창 옮김 [다른 세상의 아이들] 고양: 산눈, 2007
그리고 나는 이곳에 짧은 글만 끼적일 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부끄러움을 느끼지만, 이런 부끄러움이 나의 양심을 위한 임시방편이 아님을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다른 책을 사며 이 책을 함께 샀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논조인지 정확하게 확인했는지 의심스럽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저자의 논조 때문이었다.
만약 저자가 어린이 노동/일을 근절해야 하는 끔찍한 것이라고만 주장했다거나 어쩔 수 없으니 점진적으로 개선하자고만 주장했어도, 읽지 않았거나 읽다가 중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이런 식의 주장이었으면 저자는 이 책을 쓰지도 않았겠지만. 저자는 근절을 주장하며 아동 노동/일의 끔찍함을 주장하는 것의 이면을 폭로하는 동시에 점진주의가 가진 허상도 동시에 드러낸다. 물론 이 과정이 유쾌하진 않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설명하기보다는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분명 ‘영리’하지만, 보여주기 방식이 각 챕터의 후반부에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나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혐의가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19세기 영국에서 빈번했던 어린이 노동/일이 현재 남반구/남아시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일과의 유사성에 있다. 지금 남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일이 마치 미개발국가, 문명적이지 않은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제3세계의 현상으로만 치부하는 서구의 논의는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빈번했던 어린이 노동을 은폐한다. 그러니 이 책 제목의 한 구절 “다른other”은 “나와는 무관하지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와 무관한 현상처럼 간주하는, 타자로 만들어 가는”이란 의미다(other의 의미를 꽤나 적확하게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방글라데시(저자는 주로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을 중심으로 논하고 있다)의 경제가 발전하면 어린이 노동이 없어질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행여나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린이 노동은 없어지거나 통계상 현저하게 줄어들지 모르지만, 그 노동은 또 다른 국가/지역으로 이동해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이 노동/일을 근절하자는 주장도 점진적으로 개선하자는 주장도 문제가 많다.
어린이 노동/일의 근절이 가지는 허상은, 어린이들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 상품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일시적으론 어린이들이 공장이나 여타의 노동현장에서 벗어났지만, 이들은 더 어려운 삶을 살아가거나 이전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길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전의 일을 하기 위해 공장주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서라도 일을 하고자 한다. 아이들이 일을 못 하게 되면서 아이들이 속해 있는 가족은 더 가난해지고 삶은 더 피폐해졌다.
남반구에서는 그런 압력들이 오히려 서구의 산업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의 피땀으로 얼룩졌다고 생각되는 제품을 꺼려하는 서구 소비자들의 양심을 보호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널리 믿는다. 서구의 양심 때문에 실직한 아이들의 운명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은 서구의 의제가 반드시 어린이들에게 혜택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102쪽)
아울러 어린이 노동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히 서구 중심적인 입장인데
유엔 아동권리조약은 어린이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항들을 담고 있다. 32조는 경제적 착취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언명하고, 28조는 교육받을 권리를 다룬다. 이 조약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이상화된 서구적 가족규범을 어린이 보호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는 인도아대륙을 비롯한 여러 곳의 확대가족과 합동가족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이미 해체가 진전된 서구적 가족유형을 장려한다. (99쪽)
저자는 계속해서 19세기 영국의 어린이 노동/일의 현상과 20~21세기 남반구 국가의 어린이 노동/일의 현상의 유사성을 비교하지만, 그렇다고 이 둘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아울러 그 지역의 국가경제가 발전하거나 경제적인 여건이 좀 더 나아지면 될 거라는 믿음의 허상도 분명하게 지적한다.
노동하는 많은 어린이들이 공부하길 바라지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다고 해결되는 것이 많은 건 아니다. 한 비정부단체는 아이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하지만 이 아이들을 선택하는데 몇 가지 자격을 제시함으로써 교육받을 수 있는 어린이와 교육받을 수 없는 어린이, 아이가 교육을 받아도 생계가 덜 위협적인 계층과 아이가 교육을 받으면 생계가 치명적으로 위협받는 계층을 다시 나누는 문제가 발생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아울러 ‘노동하는 어린이’와 ‘교실에서 공부하는 어린이’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너무도 간단한 인식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동시에 교육이 무조건 좋다는 건 상당히 허상이다. 교실에서 정규교육을 이수했지만 별다른 희망을 갖지 못 하는 이들(한국에서 특히나 많이 접할 수 있는데)이 정규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삶을 영위할 상당한 지혜가 있는 이들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수백 가지의 나무, 꽃 그리고 이들의 뿌리를 이용할 수 있지만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은, 비록 통계상으론 ‘문맹’으로 표시되고 ‘낙후’로 표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실에서 기계적인 교육만을 받고 ‘발전과 개발’만을 외치는 이들이 이들보다 더 나은 걸까?
저자 스스로는 상당히 경계하고 있지만 서구중심적인 인식은 꽤나 자주 드러난다. 아울러 성별관계에 따라 노동의 의미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블란쳇의 논의를 빌려올 때를 제외하면 이와 관련한 논의가 드물다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꽤나 좋았다면, 근절도 점진적인 개발도 아닌 그 어느 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려는 저자의 노력 때문이다. 당연히 분명한 대안은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어린이 노동을 불쌍하게만 여기지 않으려는 저자의 노력만은 중요하다고 느꼈다.
덧붙이면, 저자는 방글라데시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지만, 한국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한국에서 10대들은 학교에서 입시공부를 하는 존재로 간단하게 등치되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자리를 찾는 10대들은 “문제아”로 불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인식이 10대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이들의 노동시장을 논하기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일을 하더라도 아르바이트만 구할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일이 상당히 제한적이고, 최저임금마저 지켜지지 않는 경향이 상당히 많고. 관련 논의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당연히 나의 무식에서 비롯한다는 점에서 반성을 하기도….
온종일 농장에서 커피콩 따서 1불도 못버는 아이들보다 학교/학원에서 온종일 강요된 공부에 치이는 이 나라 아이들이 더 행복하단 보장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절대빈곤의 문제를 파고들어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별 대안없는 문제라는 점이 가슴아프군요.
예. 정말 어떤 대안도 대안일 수 없다는 상황이 가슴아프고도 머리 아파요. 지금과는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먹먹하기도 해요.
제3세계에서 한국으로 시선을 바꾸어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할 수 있다는 점에 동감해요. 외국을 봤을 때, ‘어린이 노동’을 단순히 부정한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점, 한국에서 ‘청소년 노동’이 철저하게 무시된다는 점에서 고민해야지요. 음..개인적으론 한국의 그런 ‘이야기’에 대해 관심이 더 가네요.
한국 10대들의 상황을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으로 인식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입시가 너무 큰 거 같아요.
저도 한국의 아이들에겐 공부=일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예전에 읽은 어떤 만화에서, 입시공부를 완전 노동착취에 가까운 중노동처럼 설명한 구절이 떠올라요.
10대 혹은 어린이와 관련한 인권을 계속해서 “어린 것들의 투정”으로만 여기는 점이 관련 논의를 막는 것 같기도 해요.
저도 읽어보고싶어요. 이 책.
이상하게도 선뜻 추천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꽤나 괜찮은 책이긴 해요. 근데 종종 거슬리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흐흐. (급소심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