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들어갈 용어설명으로 쓴 초안. 이 초안을 토대로 얼마간 수정해서 인터뷰 자료집에 들어갈 예정. 그냥 이런 의견도 있다고 읽으면 되욤. 흐 ;; 마무리가 많이 허접하다.
LGBT(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바이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의 맥락에서 커밍아웃과 아웃팅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밍아웃은 성적지향/성정체성이나 성별정체성을 스스로의 의지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고, 아웃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식의 설명은 커밍아웃과 아웃팅의 기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긴 하지만, 충분한 건 아니다.
커밍아웃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상이 반드시 ‘다른 사람’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모든 사람은 주민등록번호상의 성별과 갈등 없이 자라고,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가정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이 주변에서 기대하는 성별이 아니라고 느끼거나, 이성애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당혹과 긴장을 느끼며 자신에게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이런 긴장과 갈등의 과정에서 규범적인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커밍아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반드시 긴장과 갈등을 경험하는 건 아니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다.) 즉, 커밍아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할지의 여부를 고민하고 결정한다. 이때, 자신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더 이상 긴장과 갈등을 경험하지 않는 건 아니다. TV 등 언론매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얘기하며 이와 관련한 인권활동을 하는 이들이라고 해서 긴장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란 점에서, 자신에게 하는 커밍아웃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다른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라고 해서, 누구에게나 커밍아웃을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다른 사람에겐 말해도 가족들에게만은 말하지 않는 이들, 친한 사람들에게만 얘기하는 이들, 오프라인 자리에선 얘기하지만 언론매체엔 나가지 않는 이들처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는 개인마다 다르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숨기는 것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이는 내가 상대방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판단에 따른다. 전적으로 신뢰하고 평생 친구로 여기지만 커밍아웃으로 헤어질 것을 염려하여(실제 이런 경험들이 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성별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밝히는 것의 여부가 관계를 지속하는데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하지 않을 수도 있다(이를 알아야만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이것이 한 번에 끝나는 작업은 아니다. “저 트랜스젠더예요.”라고 얘기할 때, 상대방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도 있고, 이 말에 화가 나거나 당황할 수도 있고,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화를 내거나 더 이상 소통하길 거부하는 경우라고 해서, 이를 혐오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에게 커밍아웃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상대방 역시 이런 커밍아웃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일테면 “난 레즈비언이야.”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상대방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알아들었나보다 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남자친구 안 사겨?”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커밍아웃은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험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커밍아웃을 통해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해서 얘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피곤한 작업이긴 하지만, 한 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당연하다(이는 상대방이 LGBT이건 아니건 상관없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일회성 통보가 아니라 ‘난 당신과 나의 어떤 정체성과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당신은 나의 어떤 정체성을 고민하며 나와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이자, 나의 어떤 정체성과 관련해서 소통하겠다/하고 싶다는 신호이다.
트랜스젠더와 비이성애자가 ‘낯선 존재’로 여겨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정말 낯선 건지, 낯선 것처럼 행동하는 건지, 낯설게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잊어버린 낯설음인지는 모호하지만), “나는 mtf다.”라고 말하는 건 간단하지 않다.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의 경우, 지금까지 나를 “남성”으로 대했다면 이제부턴 “여성”으로 대해야 하는 건지, 아님 “트랜스젠더”로 대해야 하는 건지,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여성으로 자란 사람처럼 대해야 하는지,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을 텐데 이 시기의 경험을 물어봐도 되는지 등등, 상당히 많은 것들이 어려울 수 있다. 현재사회에서 “낯설다”는 건 “잘 모른다”는 의미란 점에서 “난 mtf야.”라고 커밍아웃하는 건, 상대방에게 낯설음과 당혹스러움만을 줄 수도 있다. 아울러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는 mtf야.”와 같은 말이 나의 무엇을 알려주며, 내가 레즈비언 트랜스임을 알았다면 나의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면, 내가 mtf라면, 이런 말이 현재 사회에서 레즈비언이나 mtf에게 덧씌운 이미지로 나를 대하도록 하는 효과는 낳을 수 있어도, 이 말 자체가 나와 관련해서 알려주는 건 극히 적다. 그러니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이전까지 맺어온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전까지 맺어온 관계부터 앞으로 맺어갈 관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정이다.
아웃팅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정체성이나 성별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 문제인 건, 이와 관련한 혐오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실제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임이 드러나서, 트랜스젠더임이 알려져서 회사에서 해고되거나 취업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혹은 아웃팅을 협박하며 돈을 갈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일부에선 아웃팅은 범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웃팅이 생활공간에서부터 생존기반까지 위협할 수 있는 효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아웃팅은 범죄”라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아웃팅의 위험만을 강조할 경우, 역설적으로 커밍아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커밍아웃 자체를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니 커밍아웃을 고민한다면, 커밍아웃의 긍정적인 효과(자기 긍정, 주변의 지지 등등)와 아웃팅의 문제를 동시에 고려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서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 편, 커밍아웃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는 커밍아웃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나는 레즈비언 트랜스야.”, “나는 게이야.”, “나는 바이야.”, “나는 (이성애자) 트랜스젠더야.”란 식의 말하기 과정은, LGBT인 상황의 사람들만 커밍아웃하고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인 사람들은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 같은 효과를 낳기도 한다. 아울러 LGBT인 상황을 마치 ‘커밍아웃 해야 할 무언가’로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레즈비언이야.”, “나는 mtf야.”란 식으로 커밍아웃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해야만 하는 무언가’로 이해할 경우, 정작 문제제기하고 고민해야 하는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주의는 당연한 토대로 둘 수 있다. 그러니 커밍아웃은 기존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인 동시에, 이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전제에 문제제기하는 과정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커밍아웃, 아웃팅에 대해서 여러 관점으로 생각하게 하는 글이에요.:)
초안이라 사실 좀 부끄럽기도 해요. 그냥, 이런저런 고민을 공유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헤헤.
고마워요. 🙂
사람들이 세상에 비이성애자나 트랜스젠더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 주변 사람은 모두가 이성애자라고 굳게 믿는달까… 우리 회사 직원이 얼마 전에 해외 출장을 다녀왔는데, 현지 직원 중에 어떤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 게이라고 알려줬더니, “정말 게이예요?”라고 다섯 번은 물었어요. 나중엔 말해준 걸 후회했다는. 아 왜 사람 말을 못 믿는겨. -_-;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니까요. 직접 커밍아웃을 해도, 사람들은 안 믿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물어 보는 경향이 있어요. 마치 저 사람만은 절대 아닌 것처럼… 자기가 직접 만나는 사람은 절대 아닐 거란 확신이라도 있는 것처럼요..
‘난 당신과 나의 어떤 정체성과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마아악 공감하고 있어요. 딱 적절한 표현이에욧 ㅎ
흐흐. 고마워요! 🙂
정말 커밍아웃은,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당신과 이와 관련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소통의 신호 같아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