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일상적인 정체성 검열, 승인, 규제 장치로서의 공간

어제 모 대학에서 진행한 행사의 일환으로 특강을 갔다 왔어요. 행사 제목은 “1인 화장실을 꿈꾸는 문화제, <너는 어디로 가니?>“ 제목을 보면 아는 분은 아시겠죠? 흐흐.

어떻게 보면 급하게 만든 강연록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잡고 읽으면서 설명 하기 위해 만든 거라, 정확한 문장이나 문단은 없어요. 때로 맥락이 빠진 부분도 좀 있고. 그냥 재미 삼아 참고로 읽으면 재밌을 거예요. 흐.

[#M_ 길어서 접음.. |좀 많이 길어요;;.. |

화장실: 일상적인 정체성 검열, 승인, 규제 장치로서의 공간
-루인(runtoruin@gmail.com)

1. 화장실을 고민하다
-2007 인권활동가대회에서, 참가를 준비하기 전에 이미 화장실과 관련한 조율을 했고 각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 문제가 없었음. 하지만 행사 장소에 가서 방을 배정하기 전에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없었어. 그리하여 화장실 문제를 공식 이슈로 제기했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꽤나 강한 인상을 준 듯. 이때 임시방편으로 층에 따른 사용을 구분했는데(2층은 구분해서, 3층은 구분 없는 것으로), 하지만 결국 사용하지 못 함. 기호의 문제. 그리고 기호의 무게.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애운동단체와 화장실이 공동의 이슈로 가능하겠다는 공감대를 형성함. 성별이분법으로 나뉜 비장애인 화장실의 문제와 무성적 존재로 성별 구분 없이 장애인 화장실만 있는 문제의 접점을 모색하며 나온 아이디어가 일인화장실 혹은 개별화장실

-mtf와 ftm의 경우, 수술이나 호르몬 투여 여부에 따라 그리고 화장실의 조건에 따라 사용 가능한 공간이 전혀 다름. 아울러 신체를 변형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화장실과 같은 “여성”/“남성” 구분이 분명한 공간은 불편한 동시에 곤란한 공간. 이런 고민은 트랜스젠더 만의 고민은 아니며, 부치를 비롯해서 외형이 기존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 그리고 기존의 규범적인 외모에 어느 정도 부합하거나 트랜스젠더가 아니어도 이런 구분이 불편한 이들은 상당함. 일테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며 화장실의 성별이분법을 문제제기한 분도 있어. 화장실의 성별구분과 군대의 성별에 따른 차별/구별의 접점을 지적.

-2008 인권활동가대회에선, 각 방에 있는 화장실 말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의 경우, 개별화장실로 사용함. 좌변기만 사용하기로 하고 소변기 칸은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 이에 문제제기가 두 가지 있었는데, 어떤 장애인의 경우 좌변기보다 소변기 사용이 더 편하다는 점, 혼자선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음에도 개별화장실 혹은 일인화장실이라 활동보조원과 같이 들어가기가 부담스럽다는 것. 이것 외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

-이런 반응의 결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월 초에 있었던 인권활동가들을 위한 인권교육워크숍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함. 활가대회에선 입구가 하나고 하나의 입구에서 “여/남”으로 갈라지는 방식이었다면, 교육워크숍에선 서로 떨어진 곳에 있었음. 그리고 관찰한 결과, 내부 구조가 달랐음에도 개의치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익숙한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나뉨. 이는 여전히 몸에 익숙한 공간을 찾는 기호와 상징의 무게가 작동한 효과일까, 반드시 그렇진 않아도 여전히 어떤 금기가 작동하는 걸까?

-모든 공간이 성별이분화 되어 있음에도 그럼 왜 굳이 화장실을 가장 많이 얘기하는 걸까? 단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기 때문에? 공공장소로서 사용할 때마다 비용을 지불하는 공간이 아니어서? 하지만 화장실을 구성하고 설계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비용이 지불되는 것. 기존의 화장실과 다른 방식의 화장실을 구성하고, 장애인 화장실을 만들거나, 장애여성과 장애남성 화장실을 만드는 것이 힘든 건 항상 경제문제인데 이것 자체가 비용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동시에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다른 화장실이란 상상력은 어떻게 가능할까?

2. 화장실의 역사와 현재: 일상의 규제장치
-아파치족 인디언이나 중세 아일랜드인의 경우, 남성은 쪼그리고 앉아서 여성은 서서 소변을 봄. 이는 19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빈이나 파리 할 것 없이 유럽의 어느 거리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함. 19세기 즈음에도 여성의 노상방뇨가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는 건, 근대기획을 통해 여성의 몸이 숨겨져야 할 것, 성적인 대상으로 변했다는 걸 의미. (cf. 인도의 화장실 문화, 영화 [Q2P])

-대변 역시 서서 보는 관습과 쪼그리고 앉아서 보는 관습이 일률적이지 않으니, 양변기 사용은 일종의 문화적인 규율. 좌변기가 만들어졌을 당시(19세기 즈음), 사람들은 좌변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았음. 그 당시 대변을 서서 하는 경우도 있고, 쪼그리고 앉아서 하는 경우도 있었음. 좌변기의 경우, 의자에 걸터앉아 사용하는데, 이런 습관이 낯선 경우가 많았음. 그래서 좌변기에 올라가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앉아서 일을 보는지 감시하기 위해, 화장실 위와 아래를 뚫어 둠. 아래를 뚫은 건, 다리가 바닥에 있는지를 확인 하는 것이며, 위를 뚫은 건 머리가 보이지 않은 걸 확인 하는 것. 지금의 화장실 역시 아래와 위가 뚫려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환기나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규제와 감시의 역사적인 맥락이 공존하는 것으로 해석 가능.

-노상방뇨가 불법이 되고, 공중화장실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위생과 청결의 근대성과 노상방뇨를 금기시 하는 분위기 조성이 한 몫 함. 사람들이 보는 대로에서 소변과 대변 행위를 하는 것이 수치심과 당혹감을 유발하는 것이란 인식이 퍼지면서 “볼 일”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봐야 하는 것으로 바뀜. 화장실에선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인식 역시 화장실 사용을 일종의 수치심 혹은 부끄러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의미함.

-화장실의 위생개념, 더러움과 불결함에의 혐오는 근대 이후 발생한 개념. 당연히 이런 관념은 근대과학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함.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과학의 이름으로 규제하기 시작(일테면 일제시대 가사노동의 과학화/합리화란 광고가 등장하고 실제 가사노동의 과학과 능률이 당시의 지배적인 인식으로 일상생활을 규제함). 아울러 근대 (성)과학의 발달은 비이성애자, 트랜스젠더들, 장애인들 등을 불결함,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병리적인 현상으로 설명하기 시작. 이전까지 주변에서 만나던 사람들이 정신병으로, 고쳐야 할 대상으로 바뀌고, 혐오와 불결의 대상으로 바뀜. 이런 맥락에서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여성”/”남성”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은 불결하고 오염된 존재. 가까이 하면 오염될 수도 있다는 언설이 가능해짐. 이는 최근에도 여전한데, 학교 수업에서 “동성애”를 가르치면 학생들 가치관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언설이 설득력을 얻고, 이반이면 학생들과 격리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것과 궤를 같이 함. (최근 한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특강을 하려고 했을 때 불허한 사건이 있음.)

-이런 과정에서 비규범적인 이들은 “사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함. 물론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살아가고 있지만, 소위 말하는 “공적 공간”에서 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낯선 이들이 됨. 아울러 자신을 규범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들은, 동성애자, 양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 간성, 장애인의 존재를 모르거나 부인해야 하는(정말 모르는지, 모른다고 부인하는 건지, 모른다고 부인해야 하는 것조차 망각하는 수위의 부인인지는 모호함) 존재로 여김. 그리하여 LGBTQI/장애인들은 매체나 모니터 너머에서만 접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짐. 즉, 이들은 근대적인 공간에서 배제됨. 이는 근대적인 공간과 제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통해 알 수 있음. 간단하겐 화장실, 기숙사, 목욕탕 등의 공간이 비장애 “여성”과 “남성”들만 출입 가능한 곳으로 이루어진 것.

-그렇다면 자본주의 혹은 근대 사회는 사회인을 누구로 규정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 비트랜스젠더, 비장애인, 그리고 때로 “남성”들만이 존재하는 구조. 회사가 빈번한 동네에 “여성”사우나가 없는 곳이 많고, 국회의사당에 “여성”사우나나 화장실이 없었던 적이 있었음. 장애인이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고서야 장애인 출입이 가능하도록 보수했다는 말은, “사회생활을 한다”란 말의 주어가 누구인지를 알려 줌. 결국 근대 공간, 근대에서 얘기하는 개인/사회인은 배제와 은폐를 통해 이루어지며, 규범적인 존재들만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함.

-이는 또한 개인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무엇인지를 알려 줌. 즉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누구인지, 어떤 몸을 지닌 인간을 요구하는지를 안다는 건, 개인을 어떤 식을 통제하고 규제하는지를 알 수 있음. 기존의 규범적인 형태의 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트랜스젠더들, 간성들, 장애인들이 생활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한다는 건, 개인을 통제하는 주요 정체성(정체성과 통제는 사실 상 동의어)에 젠더와 장애여부가 있다는 것을 의미. 농담처럼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낯선 누군가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성별과 나이란 것처럼, 성별은 소통의 첫 번째 잣대이며, 여기에 장애여부가 없다는 건 애당초 장애인은 만날 수 없는 어딘가에만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피부색, 출신지역, 언어, 성적지향 등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는 고려사항에도 없다는 걸 의미.

-그리하여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며 경험하는 공간은, 성별과 장애를 통해 개인을 통제함. 특히나 화장실이 개인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곳으로 작동한다는 건 출입 가능성의 여부에 따른 문제에서 발생. 앞서 얘기했듯, 소변기만 있는 남자화장실의 경우, 호르몬 투여를 통해 남성으로 통하는 ftm들은 사용이 불가능하고 동시에 여성화장실 사용도 불가능. 남성으로 좀 더 통하는 mtf의 경우 역시, 화장실 입구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혹은 갈 수 있는 지로 고민. 이런 고민은 장애/비장애 구분으로도 발생하는데, 경증장애인이라 비장애인 화장실 사용이 가능한데 장애/비장애로 구분하고 있다면 어떤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까? 즉, 화장실은 “너는 누구냐”, “너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느냐”를 물어보며, “네가 이 화장실 공간을 사용하는데 적합한 인간인지 네 스스로 한 번 확인하라.”고 말함. 화장실 앞에 서는 순간, 나 자신이 규범적인 요구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질문해야 한다는 점에서, 검열과 승인이 동시에 일어나며,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 없거나 갈등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규제 장치.

-결국 화장실 앞에 붙어서 개인을 규제하는 기호 혹은 상징의 무게가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 이런 금기를 위반하기 힘들고 이런 위반을 상상해본다란 말 자체가, 이미 실현의 어려움과 상징과 기호의 무게를 알려줌. 다른 상징과 기호가 그러하듯, 화장실의 상징과 기호 역시 개인을 규제함. 이럴 때, 지금 내가 남자화장실을 사용하건 여자화장실을 사용하건 모두 퀴어한 상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 이 공간들을 사용해야 하는 나는 곤혹스러움. 각각의 기호가 가진 무게와 ‘위반’은 짜릿한 쾌락인 동시에 곤란하고 언제나 갈등을 요구함.

-일테면 치마와 바지로 구분한다면, 치마를 입고 있는 사람과 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곳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 하지만 “여성”이 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서, 바지 입은 사람으로 해석 가능한 표지의 화장실을 사용하지는 않음. 때로 빨강과 파랑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그럼 두 가지 색깔 중, 빨강을 좋아하는 사람은 빨강으로 표시한 화장실에,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랑을 표시한 화장실에 가면 되지만 그렇지도 않아. 즉, 이런 기호는 여성의 옷과 남성의 옷, 여성을 상징하는 색과 남성을 상징하는 색이 무엇인지,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걸 의미. 동시에 여성과 남성 각자에게 요구하는 복장과 취향, 혹은 여러 행동 방식이 있다는 걸 의미하며, 이를 규제하고 있다는 걸 의미.

-화장실문화와 관련한 책(저자는 한국인, 발행연도는 2000년대)에서 저자는 화장실의 성별을 구분하는 기호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처음엔 치마와 바지 표시가 헷갈려서 잘못 들어가곤 했다는 에피소드를 적었음. 지금에야 이런 표시가 헷갈린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과거엔 성별구분이 없는 화장실이 대부분이었음. 또한 1960~1970년대에 걸쳐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을 “개량”하기 전까진 대부분의 화장실이 “푸세식”이었고, 성별표시가 없었기에, 바지와 치마 구분에 따른 화장실 성별구분이 헷갈림이 당연한 것일 수 있음. 즉, 지금 화장실을 구분하는 표시가 당연한 문화가 아니라, 근대기획 속에서 익숙해진 것임을 의미.

3. 일인 혹은 개별 화장실을 상상하다
-술집 등에서 쉽게 접하는 공용화장실의 경우, 얼핏 보기에 따라 두 가지 대립하는 이슈를 제기함. 우선 많은 “여성”들이 술집과 같은 공간에 있는 화장실 사용을 꺼림. 이런 공간이 성폭력 등의 가능성이 상당하고, 구조 자체가 상당히 위협적이기 때문. 다른 한편, 트랜스젠더들의 경우 이런 공용화장실이 편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입구에서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갈등할 필요가 적기 때문. 그렇다고 이 말이, 공용화장실이 그 자체로 편하다거나 좋다는 의미는 아님. 그럼에도 이런 이해는,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함.

-실제 일본의 경우, 트랜스젠더 운동의 한 방식으로 개별/일인화장실을 법제화 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개별화장실의 경우 몰카를 설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제화가 실패함. 그렇다면 과연 여성주의운동과 트랜스젠더운동에서 제기하는 화장실 공간은 상충하며, 성별을 구분한 장애인화장실을 요구하는 장애여성운동과 트랜스젠더운동은 서로 상충하는가.

-이런 식의 대립은, 기존의 구조에 문제제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기 쉽다는 점에서 문제. 쟁점은 이들 집단의 이익의 상충이 아니라 이들 집단의 이익이 상충하는 것으로 만드는 구조에 문제제기 하는 것. 동시에 이렇게 구분하면 성폭력에서 안전할 것이란 믿음 역시 문제인 것. 분리와 구분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일시적인 장치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인 대안일 수는 없어.

-미국 캘리포니아(?)의 경우, “여성”/“남성”이란 구분에 따른 화장실뿐만 아니라 개별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곳이 꽤나 있다고 함.

-성별/장애를 구분하고 있는 현재의 화장실은, 다른 한편,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고 있는 방식. 일테면 비장애-비트랜스-여성이면 이러이러하게 행동하고 저러저러한 외모이다, mtf면 이런 외모에 과잉 여성성을 재현할 것이다와 같은 선입견이 개인을 해석하는 토대로 작동하고 있음. 이는 역으로, 비장애-남자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비장애-남성, 장애인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럴 때 성별은 무시됨)이라고 가정함. 내가 누구인가와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별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일치시킴. 게이는 여성스러운 행동을 할 것이다, 부치는 남성적이고 때로 마초일 것이다와 같은 말은, 정체성과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건, 곧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것, 성별을 규제하는 방식이기도 함. “여자다움”, “여자가 칠칠맞지 못 하게”와 같은 언설은 여성이란 성별정체성과 여성의 행위를 일치 시키는 것. 내가 여성이란 것과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건 별개이지만, 이 둘을 일치시킴으로서 개인의 행동과 정체성을 규제함. 그리고 일치할 것을 요구하는 규범에 부합하지 않을 때 상당한 비난과 폭력을 행사함. 이런 비난과 폭력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개별화장실이란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행위와 정체성을 일치시키려는 기획에 문제제기하는 것이기도 함. 물론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불편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방식이기도 함.

4. 그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하지만 “사먹기 싫으면 안 사먹으면 된다.”, “잘 키워서 1억짜리 소를 만들면 된다.”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사회, 자본주의사회에서 개별화장실은 어떻게 실현 가능할까. 사실 이 질문에 다소 무력함. 개별화장실의 경우, 한 명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넓어짐. 비장애-여성/남성화장실, 장애인화장실로 구분하고 있는 현재의 방식에서, 2분 동안 10명이 사용할 수 있다고 치자. 내가 다니는 학교의 경우, 장애인화장실은 한 층에 한 칸 뿐인데, 개별화장실은 장애인화장실 정도의 공간을 요구함. 이럴 때 지금의 방식의 대안으로 개별화장실을 얘기한다면, 장애인화장실 규모의 화장실이 10개 정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의미. 학교의 경우, 화장실 공간을 확장하지 않으면 쉬는 시간 10~15분 동안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는 이들이 많을 것(그렇다면 쉬는 시간을 1시간 정도로 늘여야 할까?). 이는 곧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에 부딪힘. 그렇잖아도 공간이 부족하다는 말이 많은 상황에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우선, 효율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전엔 개별화장실의 실현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음. 혹은 한 층에, 비장애-여성/남성, 장애-여성/남성, 개별화장실, 이렇게 5가지를 기본으로 갖추도록 요구할 수도 있긴 함.

-비단 화장실만의 문제는 아님. 기숙사, 목욕탕, 증명서나 기록부에서의 성별표시란, 만나는 개인을 구분하는 방법(언어)들, 등등 성별을 둘로 구분하고 있는 현행 제도 자체에 문제제기가 들어갈 때만 개별화장실의 의미가 살아날 듯._M#]

4 thoughts on “화장실: 일상적인 정체성 검열, 승인, 규제 장치로서의 공간

  1. 화장실에 이렇게 많은 논의의 단초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고 막 흥미로웠어요. +_+ (제가 무식했단 얘기)

    1. 저 역시 특강 청탁을 받고 좀 더 찾아 보면서 더 많이 배운 것들이 많아요. 그냥 서로 앎을 나누는 거 같아요. 헤헤. 저도 라니님에게 제가 모르는 걸 많이 배우는 걸요. 🙂

  2. 우와, 화장실에 대한 이런 이야기, 굉장히 흥미로워요!
    근데 서서 볼일을 봤다는 사실은 정말 쇼킹!
    하긴 아기들은 누워서도 볼일을 보니까…

    1. 당시 판화 같은 걸 보면, 길에서 다들 서서 볼일을 보는 걸 보고, 정말 흥미로웠어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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