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답지 않게 잠시 외출을 했어요. 이렇게 나갔다 왔다고 해서 별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 예요. 그냥, 바람이 많이 차서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에 짜증이 조금 났었나 봐요. 그러니 무심결에라도 당신을 떠올릴 시간은 없었어요.
요즘 쓰고 있는 글을 보며, 조금씩 두려워하고 있어요. 왜 이렇게 위험한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하고. 신랄함은 비판 받기 두려운 이의 행동이라고 했던가요.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날이 잔뜩 서 있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듣고 쓰는 글이라지만 종종 그런 몸앓이들이 지나치게 날을 세우고 있다면, 스스로도 치치기 마련이죠. 소통을 막고 싶어 하는 몸이 지금을 채우고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소통을 바라면서도 그 ‘피곤함’이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지만, 이런 알 수 없음은 알고 싶지 않음과 얼마나 차이가 날런지.
당신이 있는 곳엔 바람이 부는지 궁금했어요. 이런 궁금함도 일시적인 스침이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러고 보면 루인 역시 무관심 속에 둘러 쌓여있다는 몸앓이가 외출 중에 들었어요. 이 “무관심”은 흔히 말하는 그런 무관심과는 의미와 맥락에서 차이가 있긴 하지요. 그럼에도 루인이란 사람이 참, 무관심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몸의 반응을 느꼈어요. 스스로 만든 일이니 그 누구에게 말 하겠어요. 그저 이렇게 중얼거리며 제 삶의 한 단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따름이죠.
따지고 보면, 소통이라는 일도, 참 피곤한 일이예요. 자신을 돌볼 여력마저 없을 땐,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가 참 힘들어요. 그래서 자기애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예요. 스스로를 사랑할 때 에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일방적인/강제적인 희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죠.
요즘 쓰고 있는 글들에 날이 가득한 모습을 보며, 무엇이 이토록 스스로들 지치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무엇이 두려웠기에 이토록 신랄하게 말하고 싶어 한 걸까…
그래서 당신을 가만히 불렀어요. 당신, 하고. 이렇게라도 당신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다독일 수 없겠구나, 했거든요. 그러니 화내지는 말아주세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다고 혹은 당신을 이용했다고… 그저, 당신이란 이름이 너무 좋은 걸요.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