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창비)
01
고3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시간이었을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추운 겨울의 새벽. 아마 4시를 지나 아침이 오고 있는 시간이었으리라. 나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졸리진 않았다. 그 시절 나는 쉽게 잘 수 없었다. 이른 아침에 잠들었다가 두어 시간이 지나면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새벽이 다가오는 시간. 그 책에 실린 단편을 읽곤, 그길로 기차역으로 갔다. 물론 나는 멀리 떠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몇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곳으로의 이동.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 다음 해부터였나. 한동안, 해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여수에 갔다. 늦은 밤에 출발해서 이른 아침 혹은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졸다가, 밤 풍경을 보다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바다가 보이면 도착할 시간. 바다 안개가 자욱하고 멀리 파도치는 풍경이 보이면, 이제 내릴 채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나의 여행 혹은 이동은 길어야 한나절이다. 오동도 외진 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점심시간 즈음이면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나의 남은 일 년은 버틸 만 했다.
그 새벽에 읽은 책은 한강의 단편 소설집 [여수의 사랑]이었다. “여수의 사랑”을 읽고선 기차를 타기 시작했다.
02
채식을 하기로 한 이후, 아니 정확하게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이후 내 인생은 변했다. 채식을 한다는 건(어떤 음식은 먹고, 어떤 음식은 먹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큰 사건인가. 하지만 모든 사건과 논쟁은 내가 아닌 네가 일으켰고, 일으킨다. 난 단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지만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은 그 한 마디를 일종의 도전이자 굉장한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나의 행위를 ‘해석’하기 시작했고, 이전보다 더 많은 간섭과 “관심”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내 몸은 ‘나의’ 몸이 아니고, 나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타인의 감시와 감독이 스며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던가. 아니다. 그땐 그냥 피곤했다. 짜증났고 귀찮았다.
참 피곤했다. 그리고 여전히 피곤하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나를 채식”주의자”로 불렀고, 내가 먹은 음식을 간섭했다(“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 음식에 고기가 들어갔을 수도 있으니 다른 거 먹어라.”). 가족/친족이란 명분으로, 고기를 나의 입 앞에 들이민 사람들도 여럿이었다(내가 경험한 가족/친족이 특이한 게 아니라, 이것이 가족/친족의 기본 속성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별 특이할 것 없는 나는, 채식을 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가장 특이한 사람으로 변했고 언제나 관심의 중심에 섰다.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채식과 관련해서 한 마디씩 했다. “웰빙 채식” 덕에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줄었다 해도(“채식은 곧 건강이다.”, “채식은 웰빙이다.”가 ‘긍정’은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내가 “아직도” 채식을 하는지 묻는다. 한다고 말하면, 대단하다고 의지가 굳세다고 말한다. (미안)하지만, 그냥 습관일 뿐이다. 나는 그냥 내 몸이 원하는 걸 할 뿐이지만, 사람들은 채식을 통해 나의 모든 걸 해석하려 든다.
나와 너, 라는 이분법으로 간단하게 말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는 건, 소설 “채식주의자”의 시점 처리가 참 좋아서다. 화자가 채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채식을 하는 사람의 주변인이어서 좋았다. 채식주의자(그리고 “여성”)는 말 할 수(말하는 주체일 수) 없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해석할 대상이자, “해명”을 통해서만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해명”이 괜찮은 건 아니다. 해명을 요구하는 이들의 언어에 적합한 방식-해명을 요구하는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이어야 한다. “위장병” 정도는 되어야 해명일 수 있지, “꿈을 꿨어.”라는 말은 해명일 수 없다.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소통 불가능한 언어이자 이탤릭을 통해 표현 가능하며, 내 안에서만이 맴돈다.
사실 한국에서 채식을 한다는 건, (요즘 나의 관심으로 표현하자면) 익스플로러가 대세인 한국의 웹 환경에서, 파이어폭스를 사용하는 딱 그 정도일 뿐이다.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즐겁고 재밌다.
03
소설의 마지막 즈음, 다른 결말을 상상하긴 했지만 마지막 장면은 특히 좋았다.
[#M_ 스포일러일 수 있어서 숨김.. | 주의!.. |
붕대가 풀려있다는 말에, 자신의 피를 핥는 모습을 상상했다. 붕대를 풀고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벌려서, 자신의 피를 핥는 모습. 그럼 이건 육식일까 치유/치료일까 혹은 다른 무엇일까? 잘 모르겠다. 오른손에 있던, 혈흔이 선명한 새는 또 무슨 의미일까? 다친 새를 죽인 걸까? 꿈의 실현일까? 육식일까? 만약 새의 피와 자신의 피를 섞는 행위였다면, 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까? _M#]
병원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주인공이 말하는(speaking) 주체의 위치로 복귀했음을 암시한다. 주인공이 이전까진 말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항상 말하고 있었지만 그 언어는 소통 불가능한 언어였고, 다른 사람들이 해석할 수 없는 언어였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침묵에 대한 의문]이란 영화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화자가 듣기에 주인공의 말은 침묵이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통해 주인공의 말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에서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말하기로 변한다.
이 변화는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일 수도 있지만, 화자에게서 좀 더 선명하게 일어난 일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그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말하면 너무 가혹한가. 화자는 주인공의 언어가, 주고받는 말에서 말하기로 바뀌었음을 깨닫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난 이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느낀다. 못 알아듣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주인공의 말을 알아듣기까지 시간이 걸리듯,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말하는 주체로 변할 때, 화자는 섬뜩함을 느끼지만, 나는 좋았다.
굳이 이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마지막 문단은 좋았다.
04
확실히 나는 채식과 관련해선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언제든 뭔가를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 같다. -_-;;
전 그 소설이 ‘연작’소설인 줄 모르고, 단편인 줄 알고선 그 1장을 읽고난 후에 댓글을 달았었더라구요ㅎㅎ 끝에는 그런 ‘혐오’보단…. ‘식물이 되고픈 인간?’에 대한 이야기 같다는 나름의 결말이..ㅎㅎ
저도 아직 다 못 읽고, “채식주의자” 단편만 읽은 상태예요. 흐. ;;;
오랜 만에 한강의 작품을 읽어서 좋은데, 시간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