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내림

사는 곳 근처에 만화책과 비디오/DVD를 싸게 처분하는 가게가 생겼다. 이른바 폐업정리. 하지만 그곳은 처음부터 만화와 비디오 대여를 하던 곳이 아니다. 몇 달을 못 가고 재고정리, 폐업처분이란 이름으로 종류를 바꿔가며 장사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번엔 만화책과 비디오/DVD를 팔았다.

가끔 그곳에 들러 만화책을 산다. 잠 들기 전에 만화책을 읽는다. 낮에 읽기엔 시간이 빠듯하니, 잠들기 전에 읽는다. 이렇게 하루의 긴장을 풀고 있다.

최근에 읽은 만화는 귀신과 관련있는, 신내림이 소재인 만화였다. 어릴 때부터 신기가 있었던 건 아닌 듯 한데, 우연히 신이 내렸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만화다. 이런 만화를 읽으면 어김없이 만화 소재와 비슷한 상상을 한다. 아니, 재밌는 소설이나 만화를 읽으면, 소재를 내 멋대로 바꿔가며 신나는 상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그렇다고 내게 신이 내리는 상상을 한 건 아니다. 물론 내게도 신이 내리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 만화와 같다면 뭔가 재밌을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삶은 만화와 같지 않다. 그리고 이미 내게 신이 내렸는데 내가 자각을 못 하는 건지, 언젠간 신이 내릴 건데 아직은 시기가 아닌지, 신이 내릴 가능성 자체가 없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신이 내린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까?

하지만 이번에 한 상상은 내게 신이 내리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귀신이 되었을 때 나는 어디로 갈까, 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만약 상대방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아마도 서울에 머물지는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귀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곳에 가고 싶은 건 자명한 일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리라.

아직도 이런 바람에 머물러 있는 자신을 깨달으며, 조금 슬펐다. 그리고 조금 기뻤다.

8 thoughts on “신내림

  1. ‘그 곳’이 어딘지 궁금하군요. 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은 없네요. 그렇지만 오히려 나에겐 ‘좀 찍심이 있어!” 하는 생각은ㅋㅋㅋ

    전 오늘부터 버틀러 듣습니당. 루인 님과 같이 들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쉽네용~

    1. 아, 버틀러 듣고 싶었는데 통장잔고가 0을 향해 질주하고 있어요…ㅠㅠ
      재밌게 듣고 자랑해주세요! 헤헤 🙂

  2. 중고비디오 내다파는 좌판에서 늘 서성대며 고민하던 때가 떠올라서 슬몃 웃었습니다. 저희동네는 아예 비디오/dvd가게가 사라졌어요 +_+

    1. 중고비디오랑 만화책 파는 곳에서 서성이다보면 많은 근심을 잊을 수 있을 거 같아요. 헤헤.
      사지는 않아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이런 곳이 없으면 정말 아쉬워요. 🙂

  3. 그래도 역시 전 서울이 좋은 걸 보면 고향이란 게 나름의 의미가 있긴 한가 봐요 ^^;;

    1. 흐흐. 전 딱히 장소를 의미한 건 아닌데, 곰곰 고민하니 특정 장소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곳이라고 썼어요. 흐. 근데 그곳이 거의 고향 같은 곳이기도 하더라고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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