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팔랑귀란 걸 너무 잘 알고 계시는 이웃들. -_-;;
만행의 결과입니다. ㅠ_ㅠ
퀴어 관련 잡지에 보낸 글이라, 퀴어란 단어를 좀 많이 썼어요. 사실 이 단어를 그렇게까지 즐기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발송한 파일에선 제목도 달라요. -_-;; 원고를 쓸 때 처음 정한 제목은 이 포스팅의 제목처럼 “일상적인, 퀴어한”이에요. 그리고 이 제목이 더 좋고요. 흐. 근데 아무래도 수습이 안 되는 글이라, 수습할 수 있는 제목으로 바꿨어요. ㅠ_ㅠ
아,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나요. ;;;;;;;;;;;;;
[#M_ 굳이 읽으시려면.. | 뒷감당은 알아서 하세요. 난 몰라요. ㅠ_ㅠ.. |
내가 “루인”인 걸 아는 이와 학교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예전에 알았던 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활동 전에 알았던 이다. 인사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긴장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외면이었고, 알은 체 하지 말라는 의사표현이었다. ‘그’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넘어갔다. 조금 안도했다. ‘한 고비 넘겼구나….’ 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이런 반응은 우연히 나타난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준비한 행동이다. 나를 “루인”으로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동시에 마주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봐, 늘 염려했다. 그랬기에 실제 이런 상황이 닥치자,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 했다. (하지만 다른 상황이었어도 외면하고픈 사람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그간의 염려와 준비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닐 테다. 염려하고 준비하고 항상 긴장 상태로 산다고 원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염려하고 준비한 그대로 상황이 발생하지 않고, 그렇게 반응하지도 않는다. 실제, 그 순간엔 화들짝 놀랐고 당황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는 점에서, 염려가 빚은 반응인 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이런 외면 혹은 회피가 “아웃팅”을 걱정해서는 아니다. 어차피 나 아닌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다. 행여 동행이 퀴어인 걸 상대가 안다고 해서, 함께 다니는 나 역시 퀴어로 여겨질 이유는 없다. 퀴어로 여긴다고 문제될 것도 없다. “아웃팅”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퀴어인 걸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동시에 마주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더 정확하게는, 균질하지 않은 나의 역사가 신경 쓰였다. 퀴어로 말하고 다니는 현재와 그렇지 않은 과거를 동시에 만나기가 조금 두려웠다.
아마 너무도 흔할 이런 감정엔 나의 생애사가 한 몫 한다. 나를 트랜스로, 퀴어로, 레즈비언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건 고작 몇 년 전이다.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안면이 있는 이들 중 상당수는, 내가 퀴어란 걸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이성애 남성”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건 나의 추측이다. 나 자신은 이와 관련해서 말한 적 없다. “전 이성애 비트랜스 남성이에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들은 적 없다. (자의건 타의건) 밝히지 않으면 “당연히 이성애 비트랜스”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을 뿐이다. 밝히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이성애-비트랜스이다. 비이성애/트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회다. 비이성애/트랜스는 밝혀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회다. 밝힌다고, 말한다고 살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지는 확실치 않다. “적어도 나 주변엔 그런 사람들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나는 비이성애-트랜스이다. 과거의 나는, 나를 비이성애-트랜스로 설명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음이 부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를 이성애-비트랜스(남성)로 전시했다는 것도 아니다. 타인에게 나의 모든 걸 얘기할 필요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는 나를 이성애-비트랜스로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무는 나, 그들이 현재 마주하는 나는 “여전히/당연히 이성애 비트랜스 남성”이다. 그들이 기억하고 해석하는 나와 지금 내가 설명하는 나,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 불일치가 만드는 틈. 틈이 일으키는 긴장. 긴장이 유발하는 무게. 이런 무게감을 느끼는 ‘찰나’, 나는 비이성애-트랜스인 동시에 이성애-비트랜스이다.
이런 ‘찰나’, 내 몸은 ‘모순’이 경합하는 장이 된다. 난 혼자거나 익명인 곳이 편하다. 익명일 수 있는 공간은 혼자인 공간과 같다. 그런 곳에서 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날 인식할 수 있다. 나의 외모가 “부치”보다는 “남성”에 더 가깝다는 것도 모른 척 할 수 있다. 아니, 내가 트랜스이건 뭐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 도대체 내가 트랜스건, 퀴어건, 레즈비언이건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나의 몸은 언제나 나를 ‘배신’한다. 나는 트랜스이기보단 비트랜스로 더 잘 읽히는 몸이다. mtf보다는 ftm으로 더 잘 통한다. 나를 레즈비언이기 보다는 게이로 여기는 이들이 더 많다. 내 몸은 내가 주장하는 방식과 다른 식으로 읽힌다. 그리하여 나의 몸은, 나는, 나를 알려고 하는 이들과 있을 때 분열한다. 내 몸의 ‘배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진다.
이 ‘찰나’를 겪기 싫었다. 그리고 외면했다. “그래서” 외면한 게 아니다. 내가 외면한 건, 이 ‘찰나’가 내가 사는 일상이란 점이다. 이 ‘찰나’-즉, 내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모습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다. ‘찰나’로 부르고 싶은 것이다. 내가 “루인”인 걸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 외면하고 있는 삶의 단면이 얼굴을 들이민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고개가 돌아간 그 방면에 외면하는 삶의 단면이 있다. 이건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이다. 언제나 불균질하고 “모순”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상인, 뫼비우스 띠와 같은.
매일 경험하지만, 여전히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때로 불편하다. 이런 불편이 “내가/트랜스가 경험하는 어려움”이란 뜻은 아니다. 어려움일 수도 있다. 어려움으로 한정할 수 없을 뿐이다. “불쌍”히 여기는 걸 경계한다.
이런 ‘찰나’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해짐, 낯익음이 가능하기는 한가? 변하는 삶을 어떻게 박제할 수 있겠는가. 삶은 항상 익숙한 동시에 낯설다. 모순이라고 여기는 것의 공존. 모순이 아니란 뜻이다. 이를 모순이라고 부르기에 불편함이 발생한다. 이를 모순으로 부르고 싶은 욕망, ‘찰나’로 부르고 싶은 욕망이 내게 없다는 건 아니다. 모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모순으로 느낀다. 발화와 느낌 사이의 간극.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돌린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건 외면이 아니다. 내가 비이성애-트랜스인 동시에 이성애-비트랜스로 통하는 걸 인식하는 행위다. 망각하고 싶은 삶의 모습은 외면을 통해 직면할 수 있다. 이토록 퀴어하게 평이한 삶의 모습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를 피하며 조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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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이란 웹진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었어요. -_-;; 그땐 그 글이 별로였는데, 시간이 지나고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보니 나름 괜찮더라고요. ㅡ_ㅡ;; 푸핫. ㅠㅠ 하지만 이 글은 시간이 지날 수록 외면하고 싶을 거 같아요. 흐흐
저도 정말 이 글 ‘괜찮은데’요?ㅎㅎ
아마 늦은 새벽에 읽어서인지도 몰라요… 흐흐
고마워요.ㅠ
좋은데요?? 진짜로 ㅎ
흑. 고마워요.
왠지 좋다는 얘길 제가 강요하는 느낌이 살짝 들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심이 돼요. 헤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인터뷰 생각이 났어요. 전시장에서 사람들이 해대던 질문도 떠오르고. 글이 참 솔직해서 마음을 움직입니다. 말들이 쉽지 않은데도.. 참 부럽다는-.-;;
전 피곤함이나 어떤 두려움을 글로 쓰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어려운 이론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희망을 말하는 것보다는, 피곤함이나 두려움으로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달까요. 흐.
“고개를 돌리는 건 외면이 아니다”란 부분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아요…
전 종종, 자기합리화의 천재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어요. 흐흐. -_-;;
곰곰 고민을 하다보니, 사실은 그 상황을 너무 잘 알기에 고개를 돌리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