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에 몇 번인가 참가하며 깨달은 건, 죽음도 자본주의사회에선 상품이란 점이다. 죽음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돈이 오고간다. 그렇다고 과거의 죽음 의례를 낭만적으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과거엔 관의 재질과 무덤 주변을 꾸미는 정도로 계급을 과시했고, 지금은 화장 가루를 담는 도자기의 수준으로 계급을 과시하니까. 커다란 장식 꽃의 개수로도 죽음을 평가하고.
최근엔 회사의 부흥을 위해 죽음을 소비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를 써라, 그럼 트래픽 초과로 회사 가치가 올라갈 것이니” 라고. 분노를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애도한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란 영화로도 유명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의 죽음은,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죽음이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이후 트랜스젠더들이 혐오 폭력으로 죽을 때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모여 항의집회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혐오폭력으로 죽은 이들이 몇 명인지를 알려주는 사이트도 생겼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그가 그토록 파급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전에도 많은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이 혐오폭력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죽었으니까.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도 인종, 계급 등이 개입한다. 그러니 죽음을 애도하는 건 정치적인 행위다.
“여장남자”로 방송에서 유명해졌다 하고, “성전환수술”을 해서 다시 한 번 유명해진 장채원씨의 죽음을 이제야 들었다. 상품성의 여부로 죽음을 대하는 사회에서 모든 죽음은 동등하지 않다. 포털 메인은커녕 주요기사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죽음 소식에 슬픔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떠들썩할 때야 비로소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알았을 뿐 사람. 그 후론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 사람의, 아마도 마지막일 소식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슬픔이 만조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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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도
기사 제목과 내용은 언론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젠 화도 안 날 정도다.
동감입니다. 저는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의 신문을 슬쩍 엿보다가 그 기사를 봤어요. 이태원에서 살때 채원씨를 직접 본 적도 있어서 그런지… 기사를 보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지더군요. 에휴~~
예… 처음에 기사를 접했을 땐, ‘설마…’ 했어요. 왠지 믿기 싫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또 한 번의 죽음이 있었구요.
정말.. 슬픔이 만조인 시기이에요. 더구나 가장 최근 두 죽음에 대해서는 단순한 ‘자살’로 명명하기엔, 그에 따라오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슬픔이 빠져 나가질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