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즈음이었다. 학과 사무실 문에 붙은 “This Is Queer”란 포스터를 보며 사람들이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서 사무실 안에서도 들렸다. 퀴어가 뭐냐고 서로에게 물었고, 누구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한 명이, 퀴어가 뭔지는 몰라도 퀴어영화는 동성애영화니까, 퀴어는 동성애일 거라고 추측했다.
학사일정에 따르면 11월 중순 즈음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야 한다(“생긴다”가 아니라 “생겨야 한다”에 주의! ㅠ_ㅠ). 그래서 특강을 하기로 했다. 아는 분이 특강을 청탁했고, 그 분이 날짜를 조율해줘 11월 중순으로 낙찰. 하지만 다른 활동은 다 접어도 원고와 강연은 하겠다고 내심 다짐했으니 일정 조정이 안 되어도 했으리라. 요즘과 같은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움직임은 원고와 강연이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만은 해야겠다는 어떤 다짐이 있었다. 트랜스젠더 운동이 워낙 협소하고 생소해서, 원고나 강연 등이 조금이나마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물론 운동이 의무감으로만 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니 지평 확대를 위한다는 말은 대외홍보문건을 만들 때나 쓰는 거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한다. 나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 그 뿐이다.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 원고를 발송하면 곧장 자학하며 퇴고를 모색하고, 강연이 끝나면 그때부터 한 이틀 정도는 자학하지만, 그래도 좋다. 어쩌면 내가 아주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란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이건 가족사와 나의 열등감 등이 뒤엉킨 부분).
흥미롭게도 11월에 있을 특강은 수강생들의 요구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첨엔 퀴어를 별도의 주제로 잡지 않고 전체 주제에서 퀴어를 녹이는 방식으로 진행하려 했단다. 근데 수강생들이 “왜, 퀴어를 별도로 다루지 않느냐?”며 퀴어 주제를 별도로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의 특강이 잡혔고,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듣고 싶은지 미리 알면 좋아서 질문지를 받았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올렸다고 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딱, 여기까지만 고무적인 현상이다.
내게 특강을 청탁하신 분은 나를 퀴어 운동과 관련한 활동가로만 소개했다고 한다. 이 소개를 듣고 수강생이 보인 첫 번째 반응. “그 사람 게이예요?” 질문지에 등장한 질문의 대부분은 “동성애”와 관련 있다. 그러니까, 퀴어는 곧 동성애고 동성애는 곧 게이다. 아님, 퀴어는 곧 게이고 게이는 곧 동성애다. ∥OTL 정말 오랜 만에 쓰는 좌절표시다. 흐흐. 질문은 익숙한 내용들뿐이다. 동성의 어떤 점이 끌리냐, 성전환도 생각해 봤냐, 게이는 왜 다 여성스럽냐, 동성애에도 남녀 역할이 있냐, 등등. (사실 좀 더 큰 게 있는데 이건 차마 여기에 못 쓰겠다. ;;; 흐흐.)
특강을 청탁하신 분은 내게 미안해하며 특강 관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수강생들이 먼저 퀴어 주제를 요구했으니 꽤나 ‘괜찮은’ 질문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청탁하신 분과도 나눈 얘기지만, 어느 정도 ‘괜찮다’*고 여기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강좌의 맥락에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근데 난 재밌었다. 좀 웃기기도 했고. 내가 원래 이런 질문을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고. 흐흐.
무엇보다 난 질문지에 나오는 질문들이 괜찮은 내용이라고 판단한다. 천박한 질문이 가장 좋은 질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에서 언급한 질문들이 사실은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아야지.’라는 ‘상식’이 사실은 질문과 소통을 가로 막으니까. 나 자신부터 ‘이런 질문을 하면 무식하다고 찍히는 거 아닐까’ 싶어서 못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특강 가서 질의응답 시간에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천박한 질문이 가장 좋은 질문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질문은 없으며, 어떤 질문이 상처가 될지 안 될지는 말을 꺼내기 전까진 알 수 없으니, 일단 하고 싶은 질문은 다 하세요.”다. 그 질문이 아무리 심각한 혐오발화라고 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맥락을 분석하는 거고.
LGBT 인권운동**을 한지 15년 정도 지났고, 잘은 모르지만 퀴어란 용어가 한국사회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게 10년 정도다. 그리고 지금 “동성의 어떤 점이 끌리느냐”란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퀴어를 별도의 특강 주제로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거겠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질문이 나온다 해도,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거겠죠. 그 오랜 시간을 꾸준히 운동해 온 활동가들, 정말 멋져요! 앞으로도 화이팅!
이리하여, 이 글의 주제는 … 없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말이 무색하다… ㅡ_ㅡ;; 이젠 주제 없는 나의 글에 내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저 원래 이런 인간이잖아요.”라고 되레 큰소리치면서. 흐흐. ;;;
*예전에 영화 [3×FTM] 상영활동 중,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였다. 어떤 분이 “영화 상영을 진행할수록 커밍아웃과 아웃팅 문제가 발생할 텐데 이 부분은 어떻게 고민하고 있나요?”란 질문을 했다. 어떤 분은 “ftm과 여성 간의 연대를 어떤 식으로 모색하면 좋을까요?”란 질문을 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처음이라 깜짝 놀랐고, 살짝 감동적이었지만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난 “동성애 인권운동”이 아니라 “LGBT 인권운동”이라고 썼다. 당시의 운동이, 단체 이름엔 동성애만 표방했다고 해도 그 내부에선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가 함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단체 이름에 “동성애”만 사용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 단체에 레즈비언이나 게이만 있었던 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동성애”는 변태♡를 포괄하는 용어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단지 단편적으로 아는 것을 조합해서 혼자 추측하는 것일 뿐. 언젠가 인터뷰도 하고 여러 자료를 모아서, 역사 (다시)쓰기를 해도 재밌겠다. 흐.
*에.. 혹시 제가 있었던 자리에서의 질문이었는 지 모르겠는데 저도 비슷한 질문을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저도 궁금하고 고민드는 질문이었는데, 그리고 더 되새겨 보게 되어 좋았던 기억이..^^
전 지난 5월 하이퍼텍 나다에서 다큐인나다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상영할 때 들었어요. 혹시 그 자리에 계셨던 건가요? 흐흐.
글고 ‘특강 후 한 2틀 동안 자학’ 이거 웃긴데 왠지 귀여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금의 저에겐 습관이에요. 흐흐흐흐.
맞아요. 동성애자 모임이라고 이름은 달았어도 그 안에 트랜스젠더 분들이랑 양성애자분들도 다 있으셨죠. 제가 하이텔 시삽할때도 회원중에 계셨어요. 그 당시 동성애가 변태롤 포괄하는 용어였다는 것에도 저 역시 동감합니다.
글을 쓰면서 지구인님에게 나중에 물어보고 예전 역사를 새롭게 쓸 가능성을 모색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어요. 헤헤. 버디에 실린 커뮤니티 10년의 연대기는, 그 당시에도 멋졌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빛이 발해요. 🙂
천박한 질문이 필요하다. 라 참 맞는 말인거 같습니다.
상식이 없음을 따지기에는.. 아직 lgbt에 관한 상식은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이죠.
어떻게 하면 상식이 될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천박한 질문은 때때로 너무 많은 얘길 할 수 있게 해서 좋은 거 같아요.
LGBT와 관련한 정보들이 정말 상식이 된다면 더 많은 얘길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무척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