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이연(www.gofeminist.org)에서 “시대난독”이란 겨울강좌를 듣고 있어요. 여이연으로선 이번에 처음으로 무료 강좌를 개설했네요. 전 부담 없이(?) 신청했어요. 금전 부담은 없지만 내용까지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요. “간통죄,” “종부세,” “군가산점제”와 같은 이슈로 강좌를 진행하는데, 지난 이틀간은 재밌었어요. 무엇보다도 어제는 “간통제”를 가족제도, 사랑과 같은 주제와 연결해서 임옥희 선생님이 진행했는데 상당히 즐거웠어요.
(전체 일정은 여기로)
일테면 현재 이성애-규범적인 가족제도 속에서 간통죄는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선생님은 지적했지요.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요. ‘불륜’을 저지른 상대방에게 “결혼관계를 유지할래, 간통죄로 이혼할래?”라고 물었을 때, 구속을 살더라도 이혼하겠다는 의사표현은 ‘진짜로 사랑’하고 있음을 역설하죠. 이런 의미에서 간통죄는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흐흐.
다른 한 편, 간통죄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라는 논리는 상당히 취약하죠. ‘어떤 여성’을 보호하는지를 묻지 않거든요. 간통죄가 성립하기 위해선 이성애관계여야 하는데, 간통죄는 ‘아내’는 보호할지언정 ‘남편’의 애인(그 사람이 비혼 ‘여성’이건 미혼 ‘여성’이건 ‘유부녀’이건 간에)은 보호하지 않지요. 보호하지 않을뿐더러 가장 취약한 상태로 내몰기도 해요. 간통죄를 통해 더 많은 위자료를 받아낼 수 있다지만, 이건 위자료를 줄 수 있는 계급일 때에나 가능하고요. 간통죄를 존치해야 한다,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를 하기 전에 찬반 논쟁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겠죠.
하지만 어제 제가 꽃힌 말은 따로 있어요.
“사랑만큼 허약한 토대도 없잖아요.”라는 선생님의 말이었죠. 언제 깨어질지, 상대방이 언제 나를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유지될 거라고 믿어야 하는 상태. 전 이 말이 너무너무 좋았어요. 조금 바꿔서 말한다면, 사랑은 위치도 없고 토대도 없는 공간 같아요. 막연히 있다고 믿어야만 유지할 수 있는. 매순간 전전긍긍하는 상태. 가장 불안정한 상태. 이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적으로 묶어내는 방법 중 하나가, 제도로 편입하는 결혼이겠죠. 결혼은 사랑을 잃고 의무와 권리를 획득하는 방법이랄까요.
아니, 아니. 이런저런 부연 설명은 다 불필요하고. 전 그냥 ‘사랑은 가장 허약한 토대’란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의 맥락에선, 사랑이란 말 대신 관계란 말을 대입하면 더 좋고요. 🙂
그나저나, 강의를 듣던 와중에 온다 리쿠의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하나 떠올랐죠.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정리하면, 우리는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호감은 금방 눈치 채지만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경우엔 눈치를 못 챈다고.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죠. 그런 거 같아요.
사랑만큼 허약한 토대는 없다.. 흠.. 의미심장해요.
사랑은 어차피 한시적인 호르몬의 장난이라면서요! ^^
그러니까요. 믿어야 한다는 것 외에 무엇도 사랑을 보증하지 않는 거 같아요… 흐흐.
때때로 사랑이 호르몬의 장난이란 설명이 그럴 듯 하게 들리기도 해요. 흐흐.
호르몬의 장난 맞네요 ㅎㅎ
3~4년 지나면 정신차리고 후회하는거죠.
사랑이 불타고 남은 자리에 정이 싹트면 몰라도.
흐흐흐.
정말 평생 사랑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때가 있어요. 사랑이 진 자리에 싹튼 정으로 살아가는 거라면 몰라도요…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