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형수술하면 떠오르는 텍스트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네요. 무척 좋아하는 영화죠. 성형수술이 젠더 변형/성전환수술과 매우 밀접하다는 걸 알 수 있는 작품이에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제니(김아중 분)를 놀리는 이들이, 그의 차에 “인조인간”이라고 쓴 낙서는 의미심장하죠. 다른 여러 텍스트들을 상기시켜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 소설 『프랑켄슈타인』 등등. 수술을 비롯한 의료기술을 통한 몸 변형은 개인의 존재를 기이하고 낯설게 만드는 효과를 낳죠. 이 효과는 매우 특수한 이들만이 의료기술에 관련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의료기술에 무관한 존재로 여기도록 하고요.
성형수술을 하는 이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이미지도 강한 것 같네요. 그리고 이럴 때 성형수술의 이미지는, “할 수도 있지”라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거 같아요. ‘타고난 몸의 아름다움을 부정하고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몸 규범에 맞추는 실천’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죠. 성형수술을 선택하는 건 ‘주체적인 실천’이라는 주장을 허위의식이라 매도하면서요. 다른 한 편, 성형수술을 비롯한 몸 변형 실천을 아름다움의 의미를 스스로 재구성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어요. 성형수술이 반드시 규범적 미를 지향하는 실천이 아닐뿐더러, 규범적인 미를 지향한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용인되는 건 아니니까요. ‘허위의식’과 관련한 주장은, 몸 변형 실천자들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타자로만 여긴다고 비판받고 있고요.
이런 고민들의 연장선상에서 어제 읽는 논문은 흥미로워요. 캐나다 ‘남성’들의 성형수술 경험을 연구한 논문이거든요(Michael Atkinson. “Exploring Male Femininity in the ‘Crisis’: Men and Cosmetic Surgery.” Body and Society. 14.1 (2008): 67-87.). 성형수술과 관련한 많은 논문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부터 흥미롭기도 하죠.
캐나다는 현재 ‘남성성의 위기’ 시대라고 하네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고, 사회가 ‘여/남’ 평등을 지향하면서 ‘남성성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거죠. 물론 저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지 않아요. 사실 세계 어디에서도 ‘남성성’이 ‘위기’였던 적은 없어요. ‘남성성이 위기에 처했다’라는 말들만 넘칠 뿐이죠. 한국에서 1997년 IMF가 터지면서 ‘고개 숙인 아버지’란 말과 함께 ‘아버지/남편 기 살리기’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습니다. (지난 2월, KSCRC에서 주최한 “남성성” 강좌에 권김현영 선생님도 지적했듯) 문제는 아버지들이 고개를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거죠. 역사책을 봐도 알 수 있고, 매 시대 등장한 소설들을 읽어도 알 수 있죠. 모든 시대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부재해요. ‘고개 숙인 아버지’란 언설이 IMF 이전의 아버지들은 고개를 들고 살았다는 허상을 (재)생산한 거죠.
암튼, 이 논문은 ‘남성성 위기’라는 언설이 만연한 상황에서 캐나다 남성들이 성형수술을 고려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있어요. 총 4가지로 분석하는데 제가 흥미로웠던 점은 성형수술을 남성성과 연결시킨 점이었습니다. 앳킨슨(Atkinson)이 인터뷰한 남성들 중엔, 성형수술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기에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여성적인 행동’이 아니라 ‘남성다움’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수술을 고통으로 치환하고, 고통을 견디는 행위를 ‘남성성,’ ‘남성다움’으로 이해하는 거죠. 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단 점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여성의 성형수술’은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요. 앳킨슨이 질문 했지만 이 논문에선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질문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널리 알려진 언설들에 따르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가부장적 의료기술에의 종속’이라고 이해되죠. ‘여성성의 수동적/종속적 속성을 표현’한다는 거죠. 하지만 성형수술을 ‘남성성/남성다움’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여성의 성형수술’은 좀 더 흥미로워져요. ‘규범적인 여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남성다움’을 실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이 논문이 수술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에요. 몸 변형 실천과 관련해서 수술이 건강을 해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건강이란 개념 자체를 재구성할 것을 요구하는 실천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도 있지요. 이 두 가지 외에도 상당히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 중이에요. 앳킨슨은 수술과 건강이란 주제와 관련해서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다른 이의 주장을 언급하며 지나가네요. 이 주장에 동의하는 뉘앙스고요. ‘수술과 건강’이란 이슈를 좀 더 폭넓게 다뤘다면 훨씬 흥미로웠을 텐데요. 수술을 고통과 위험으로 이해할 때에만 성형수술이 ‘남성성’ 실천일 수 있긴 해요. 그래도 아쉬워요. 좀 더 다층적인 논의가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죠.
암튼 몸 변형, 신체기술과 관련한 논의들은 너무 흥미로워요. 언제 읽어도 즐겁죠.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해도. 이런 저런 논문을 네댓 편 더 읽고 나면 글을 하나 써야 하는데, 귀차니즘이 발동하려 해요. 이번에도 ‘아, 저 글만 더 읽으면 좀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텐데’라고 회피할까요?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