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태원 관련 자료를 찾으며 트랜스젠더의 역사를 유추하고 있다. 1980년대 이태원에 트랜스젠더들이 상당했음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럼 1970년대엔? 이 시기의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막연한 추측은 할 수 있다. 1970년대 박정희는 미군을 붙잡기 위해 미8군 지역 근처에 성매매 지역을 조성하고 “사회정화운동”을 펼쳤다. 이 당시 비트랜스’여성’만이 아니라 트랜스여성들도 같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 시기의 사람들을 트랜스젠더로 부를 수 있는가와 같은 논의는 별개로 하자. 일단은 현재의 트랜스젠더와 비슷한 1970년대의 사람들을 트랜스젠더로 수렴해서 부르자. 임시방편이란 항상 가장 위험한 방편이지만, 그래도 일시적으론 효과가 있으니까. 역사를 추적하기 위해 현재의 조건을 과거에 강제로 적용하는 것도 때로 유용하니까.
어제 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 무척 흥미로운 일화를 전해 들었다. 물론 선생님의 일화는 아니고 선생님의 지인이 전해준 일화. 그 일화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 트랜스젠더, 레즈비언 커플, 게이 커플은 이태원에서 익숙한 이웃이라고 한다. 문제될 것 없는, 그냥 내 이웃.
일화를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여자 커플 같은데 한 명은 여자처럼 옷을 입고, 다른 한 명은 남자처럼 옷을 입은 도배장이 커플이 이태원에서 도배 능력으로 꽤나 잘 나갔다”고 한다. 이들이 비트랜스 레즈비언 커플인지, 이성애-트랜스남성과 이성애 여성 커플인지, 이성애-트랜스남성과 레즈비언 여성 커플인지, 바이 커플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모든 명명과 구분은 현재의 것이다. 그 당시 이태원에선 이런 구분 자체가 무의미했을 터.
이 일화에서 명확하게 유추할 수 있는 건 매우 적다. 주변 사람들이(혹은 이태원 외부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여길 법한 이들이 이태원엔 빈번했음이, 이 일화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다. 이 유추를 통해, 현재의 의미로 트랜스젠더라 부를 법한 이들이 1970년대에도 이태원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일화를 전해 들으며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이 일화와 유사한 일들을 전해 줄 수 있는 분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 고백하자면, 한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건지, 중요한 증언을 들을 기회가 사라져 안타까운 건지 헷갈렸다. 아니다. 거짓말이다. 조금 부끄럽게도, 증언을 들을 기회가 사라져 안타까웠다.
+그냥 덧붙이는 근황+
계단을 오를 때마다 뒤로 넘어갈 뻔한다. 아차 하는 순간 뒤로 넘어가겠다는 위기를 느낄 때도 있다. 이 여름. 어쨌든 살아 남는 게 최우선이다. 작년보다 올해 여름은 더 덥고, 나는 더 쉽게 지친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먹고 있는데, 몸은 더 빨리 지친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은 여름이니까. 내 몸은 여름마다 항상 이랬으니까.
이태원은 마치 한국이 아닌듯한 느낌이군요 ㅎㅎ
한번 가보고 싶어졌어요.
나중에 혹시 한국에 오면 꼭 한 번 들려보세요.
한국이란 지리적 영토에 속하지만 한국이 아니란 느낌이 들 거예요. 혜진님이라면 왠지 익숙할 지도 모르겠어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