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재밌는 일로 지도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MLA 7판(2009년 발행)을 빌렸다. 논문을 쓸 때면, 본문을 다 쓴 후 참고문헌 혹은 인용문헌을 작성해야 한다. 글을 쓰면서 도움을 받은 문헌, 직접 인용한 문헌의 출처와 해당 문헌의 정보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 참고문헌 혹은 인용문헌 작성인데 이를 작성하는 표준이 몇 개 있다. MLA는 몇 가지 표준 중에서 인문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 물론 학술지마다, 잡지마다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니 몇 가지 표준 중 하나를 반드시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일종의 가이드라인에 가깝다. 나의 경우, 지도교수의 전공도 전공이지만 나 자신의 관심이 인문학에 더 가까워 원고를 쓸 때면 일단 MLA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작성을 한 후, 잡지나 편집자가 요청하는 방식으로 수정하는 편이다. 이게 좋은 건, 일단 하나라도 제대로 작성할 수 있으면 다른 식으로 바꾸는 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01
암튼 최신판을 빌려 뭐가 바뀌었나 검토했는데, 많은 게 바뀌었더라! 흑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용문헌의 형태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내가 논문을 쓸 당시인 6판(2003년 발행)에선 인쇄본이 기준이었고, 웹에서 구한 문헌을 기술하는 방식은 부가적이었다. 예를 들면
글쓴이. 『책 제목일 수도 있음』 파주: 출판출판, 2007.
저자. “논문 제목을 쓰세욤” 『잡지제목이에요』 4.2 (2006): 113-149. DBDB. 2009.09.23. <www.dbdb.org/search>
(DBDB는 논문을 다운로드 받은 사이트 이름, “2009.09.23”은 해당 사이트에 접근해서 다운로드한 날짜. 주소는 말 그대로 해당사이트 주소)
이런 식으로 웹사이트 주소를 명기하지 않은 문헌은 기본적으로 인쇄본으로 가정했다. 그런데 7판엔 이게 확 바뀌었다.
글쓴이. 『책 제목일 수도 있음』 파주: 출판출판, 2007. 인쇄본[Print].
저자. “논문 제목을 쓰세욤” 『잡지제목이에요』 4.2 (2006): 113-149. DBDB. 웹[Web]. 2009.09.23.
Print를 인쇄본으로 번역해야 할지 종이출판으로 번역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2009년 현재, 온라인 출판물은 더 이상 오프라인 출판물의 부가물이나 보조가 아니며, 인쇄본이 기준일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일. 개정판에서 보강한 부분, 공을 들인 부분들 대부분도 온라인 서비스를 인용할 때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방식이며, 모든 자료에 CD인지, 라디오방송인지, 텔레비전 방송인지를 표기하도록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종이에 인쇄한 형태의 문헌만이 권위를 가지지 않은다는 걸 의미한다. 그 만큼 웹이 일상 생활, 글작업, 학술작업에서 비중이 커졌다는 걸 뜻한다. 웹이 나의 전공은 아니라 더 자세하게는 못 쓰겠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블로그에 쓰는 글 하나하나, 트위터나 미투데이에 쓰는 단문 하나하나, 댓글 하나하나가 인쇄물과 동일한 권위라는 걸, 가장 보수적일 수도 있는 곳에서 받아들였다는 느낌이다.
덧붙이면, 미국기준으로 구글지도를 인용하거나 글에서 사용할 때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방법도 나온다.
“Maplewood, New Jersey.” Map. Google Maps. Google, 15 May 2008. Web. 15 May 2008.
“지역 이름.” 지도[자료의 성격을 표시한 것]. 구글지도[사이트 이름]. 구글[사이트 제공자 혹은 사이트 저작권자], 사이트 최근업데이트 날짜. 웹[자료형태]. 사이트 접근 날짜.
구글지도, 다음지도, 네이버지도와 같이 지도서비스를 이용하고 나서 참고문헌을 작성할 때 응용하면 좋을 듯하다.
02
작년에 논문 쓸 때는 참고문헌을 작성하는 방법만 복사해서 읽었는데, 이번엔 책을 빌렸다. 그랬더니 표절 관련 내용도 따로 있더라.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이 포스트를 쓴 이유기도 하고.
미국이나 영국논문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인용이나 참고문헌 표시를 참 꼼꼼하게 한다. 아는 사람과 대화를 한 과정에서 얻은 아이디어면 “##와의 대화”라고 분명하게 표시하는 식이다. MLA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 정보/자료, 표현방식 등을 모두 인용으로, 참고문헌에 표시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어도 윤리적으론 문제가 된다고 명시한다. 그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 한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Some of Dickinson’s most powerful poems express her firmly held conviction that life cannot be fully comprehend without an understanding of death.(56)
대충 번역하면, 디킨스는 죽음을 이해하지 않고선 삶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음을 확신했다고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정도? Wendy Martin이란 사람이 쓴 구절이란다. 근데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56: 에밀리 디킨슨은 우리가 또한 죽음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삶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기본 아이디어가 동일하다면 이는 표절이라고, MLA는 지적한다. 따라서
As Wendy Martin has suggested, Emily Dickinson firmly believed that we cannot fully comprehend life unless we also understand death(625).
Wendy Martin이 제안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인용표시(“(625)”)를 할 것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 만든 용어를 인용표시 없이 사용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하는 것도 표절이며, 다른 사람의 글을 좀 다르게 각색해서 요약하는 것 역시 표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들은 얘기, 혹은 어떤 아이디어 역시 인용과 참고문헌 표시가 없다면 표절이다. 그것이 본인만 아는 사실이라 해도.
인용과 참고문헌은 자신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도움 받은 문헌의 저자, 함께 얘기를 나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하단 점에서 법적인 문제라기 보단 윤리적인 부분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논평자들에게, 함께 얘기를 나눈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고.
오전에 표절 관련 글을 읽으면서 뭔가 정리를 할 수 있는 기분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에서, 참고문헌에는 분명히 표시하는데, 본문에서 인용을 표시하기도 애매하고 표시하지 않기도 애매한 부분들이 있어 갈등하고 있었다. 한 편의 논문과 세 권의 책을 읽고 내 방식으로 정리한 내용을 쓰는데, 모든 문장이 인용표시 없이 쓰기도 애매하고 인용표시를 하기도 애매했다. 인용표시를 하기로 작정하면 모든 문장에 인용표시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표절 관련 글을 읽어서인지 고민이 좀 해결되는 느낌이랄까. 암튼 타이밍 적절한 아침이었다.
+
본문과는 무관하지만 중요한 변화. 6판에선 도서명을 표시할 때 언더라인을 했는데, 7판에선 다시 이탤릭으로 바뀌었다. 즉 Gender Trouble에서 Gender Trouble로
나왔네요~ 저처럼 글을 아주 조금만 끄적일 뿐이더라도 절대 피해갈 수 없는 그것 ㅋㅋ
고등학교때 부터 인용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중요성은 아는데…집에 인용하는 방법만 다룬 책자도 몇개 있는데…정작 에세이 써서 낼 때는 어째 생각만 길~게 하고 마지막 순간에 글은 후다닥 처리하는 면이 있어서 지금까지 제대로 신경쓰진 않았어요;; 루인님 글 읽어보니 어째…좀 더 신경 썼어야 했다는 느낌이 드네요 OTL…선생님이 깐깐했더라면 큰일이었을지도 ^^;
북미지역의 학교에서 제대로 인용하지 않은 문장은 표절로 간주되고 표절하면 교칙에 따라 벌 받거든요;;
대학교에서 표절하면…무려 퇴학. 그것 듣고 덜덜 떨었었는데…물론 표절 할 생각은 없었지만요ㅎㅎ
오오. 고등학교 때부터 인용과 참고문헌 작성을 강조하다니 한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 한국에선 대학원에 입학하고서야 참고문헌과 인용방법을 배우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요.
그나저나 대학에서 표절이면 퇴학이라니… 표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네요. 한국에선 표절하고도 성적이 낮으면 교수에게 찾아가 따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까요. ㅡ_ㅡ;;
학술에서의 표절이 문학에서의 표절과 같을까요.
가령 작가가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티브로 소설을 창작했을 경우, 작품 말미에 각주를 달거나 일러두기를 통해 “누구누구와의 대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표기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부분은 늘 헷갈리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김현진 씨가 자기 책에 블로그 지인의 사례를 도용, 표절했다는(제가 보기에 도용은 몰라도 표절은 말이 안 되지만;) 난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작가들이 책을 쓸 때 아이디어를 얻거나 참고 자료가 되는 수많은 책들을 문학작품 말미의 참고문헌 목록에 표시해야 할까요? 조경란의 『혀』 같은 경우 그 뒤에 달린 2페이지에 달하는 참고문헌 리스트가 그 작품이 표절임을 더더욱 증명한다고 하여 문제가 됐었죠. (물론 그 이전에 조경란이 자기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한 신인작가가 있어서 이슈가 된 것이지만.) 어쨌거나 문학가들이 참고문헌을 그토록 제시하는 건 왠지 “작품을 발로 쓰지 않고 책을 짜깁기해서 쓴 것”이라고 인증하는 것처럼 되어버렸거든요.
‘아이디어’, ‘모티브’라는 것의 인용을 밝히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ㅠ
문학 작품은 또 다르게 봐야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조경란 씨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책방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넘겨보다가 책 말미에 있는 참고문헌을 봤을 땐 확실히 생경하긴 했어요. 하지만 소설이라도 글을 쓰는 과정에서 분명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읽었을 텐데, 문학작품에서만은 참고문헌을 쓰는 것이 “표절”의 증거라고 여겨진다는 건 당혹스럽기도 해요. 조경란 씨의 경우도 생경할 뿐, 몇 년에 걸쳐 답사하고 사전조사를 해서 쓴 소설이라면 분명 방대한 분량의 참고문헌이 있을 텐데, 그걸 밝히는 게 왜 문제인걸까 싶기도 하고요. 근데 이건 문학작품의 관습에 익숙한 사람과 참고문헌 작성을 중시하는 글쓰기의 관습에 익숙한 사람의 차이일까 싶기도 해요. 좋아하는 만화가가 어느 작품에서 참고문헌을 꽤나 길게 적었는데요, 전 그 모습이 정말 열심히 조사하고 준비했구나, 란 느낌으로 다가왔거든요. 제게 참고문헌은 발품을 많이 팔면서 열심히 조사했다는 의미라서요.. 하하;; 특정 사건을 조사할 때,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글을 쓸 때, 그냥 그 동네만 들락거린다고 글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분명 관련 글도 많이 읽어야 할 텐데요. 참고문헌을 밝히지 않는 작가들, 그걸 표절의 증거로 여긴 이들 역시 소설을 쓰기 위해 방대한 분량의 참고문헌을 읽지 않을까 싶고요…
확실히 문학작품의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할지 쉽지 않아요. 논문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싶기도 하고요… 흑흑.
근데 누군가에게 아이디어를 얻었다면 “작가의 말”과 같은 부분에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 정도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이게 또 문제가 되려나요;;;
뭐랄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지만, 예술이란 또 ‘독창성’을 생명으로 하기에, “어디어디에서 따온 이야기, 누구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가 치명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네요.
차라리 가이드라인이 확실하면 좋겠다고도 생각해요.
근데 확실히 작가들이 남의 인생을 듣고 작품 속에 반영할 때 허락 같은 거 안 받고 할 거 같지 않나요; 그래서 더욱 작가의 말 같은 데 쓰기 힘들 듯;
하긴… 누구의 이야기로 쓰지 않아도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는데, 누구의 이야기로 썼다간 난리가 날 거 같기도 하고요…
창작이 이야기 자체의 창작인 건지, 진부한 이야기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에 대한 창작인 건지 문득 헷갈리네요. 아마 둘 다이긴 하겠지만, 때론 후자만 취할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흐흐. ;;
참고 문헌과 인용 문제. 이거 정말 중요한 만큼 몸에 배길 때까지 해야하는 것 같아요. 좋은 정보 감사. ^^ (저 누구게요.)
그쵸? 참고문헌 작성과 인용은 매우 민감하고 판단이 쉽지 않아요. 그래서 글쓰기 만큼이나 많은 훈련이 필요하더라고요. 어떤 땐 처음엔 제 아이디어였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 논문을 읽다가 같은 아이디어란 걸 알았을 때, 이걸 인용으로 표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란 고민도 하게 되더라고요. 흐흐.
(ㅎㅃ/ㄱㄱㅎㅇ 아닌가요?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