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얘기도 있지만 이번 달 들어 지난 13일까지 읽은 단행본 중 소설 얘기나 주절거릴까요?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을 읽었습니다. 뚜렷한 증거 없이, 정황에 따라 유죄확정과 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범인이 아님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얼추 1년도 더 전에, 어쩌면 2년 정도 전에 산 거 같은데 이제야 읽었습니다. 어떤 책들은 명성에 기대어 읽었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대체로 만족입니다. 범죄와 사형제도, 생명이라는 것, 죄를 반성한다는 것 등을 이런 식으로 풀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꼼꼼하게 치밀한 구성을 이루고 있지만, 핵심적인 부분에서 허술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아쉬웠지만, 이 작품이 공식적으로 첫 번째 소설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런 자잘한 허술함이 오히려 다행입니다.(응?)
후지타 요시나가의 『텐텐』을 읽었습니다. 사채 80만 엔을 갚을 수 없어 고기잡이 배를 타야 할 지도 모르는 주인공이, 도쿄를 같이 여행하면 100만 엔을 준다는 말에 도쿄를 도보여행한다는 내용입니다. 뭔가 폼을 잡고 있긴 한데, 다소 진부합니다. 하지만 도쿄 시내(혹은 자신이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이나 도시)를 여행한다는 아이디어는 매우 매력적입니다. 저의 경우,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거의 5년 정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제가 사는 동네를 잘 모릅니다. 어떤 가게가 있는지, 어떤 골목이 있는지 ….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사는 동네를 도보여행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꽤나 재밌을 거 같습니다. 그 길엔 고양이들이 살아가고 있겠죠?
가쿠다 마쓰요의 『더 드라마』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공중정원』을 읽고 반해서 이 책도 읽었습니다. 『공중정원』은 일체의 거짓 없이 진실만 말하는 걸 모토로 하는 가족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실이 어떻게 기획되는지, 진실해야 한다는 약속이 만드는 진실한 거짓을 매우 잘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다 떠나 흥미로운 소설이죠. 그래서 『더 드라마』도 읽었습니다. 헌데 이 책은 야마모토 후미오, 에쿠니 가오리 류의 소설입니다. 30대 여성의 연애에 관한 소설이고요. 물론 작가가 다른 만큼 또 다른 재미가 있긴 합니다. 뭐랄까, 읽고 있노라면 공감하는(응?)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공중정원』의 인상이 너무 강해서인지 조금 아쉽더라고요. 나중에 『삼면기사』를 읽을 예정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유령 인명구조대』를 읽었습니다. 『13계단』을 읽은 김에 『유령 인명구조대』도 같이 읽었습니다. 자살한 4명의 주인공이 천국에 가기 위해 자살하려는 100명을 구조한다는 얘기입니다. 소설 자체는 재밌는데,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100명을 구조하니 적어도 10명의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히키코모리, 우울증, 사채금융과 카드빚, 이혼, 성적, 장애 등 각종 사회 이슈를 다 다루려고 합니다. 너무 산만해서 못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차라리 각각의 이슈를 별도의 책으로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 그리고 책 편집이 엉망입니다. 글자 크기는 보통 단행본보다 1~2포인트 정도 작습니다. 오탈자는 수시로 등장하고 심지어 줄나누기를 잘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어쩌자는 건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이렇게 편집하다니, 출판사가 너무하다 싶더군요.
요코야미 히데오의 『종신 검시관』을 읽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현장으로 가서 검시를 하는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헌데 주인공의 능력이 출중하여 주변에서 다른 부서로 인사이동을 못 하도록 로비를 할 정도고, 부하 형사들은 주인공을 교장선생님으로 부를 정도로 존경 받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전통적인 추리물의 형식에 충실하단 점입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자살인지 살인인지 밝히고, 살인이면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했는지, 살인 같은 자살이면 어떤 방식으로 자살했는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추리 자체를 강조하여 주인공의 매력을 부각하는 소설이랄까요? 비교적 최근에 쓴 소설 중에 이렇게 추리 자체를 강조한 소설은 오랜만이라 재밌게 읽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을 읽었습니다. 감히 강추합니다. 살인사건이 발생했는데 피해자는 현직 경찰. 경찰과 검찰은 사건을 비밀에 붙이고 내사에 들어갑니다. 사건을 최초 발견한 경찰은, 자동차 안에서 총에 맞아 죽은 이를 조수석으로 밀어내고 그 차를 운전해서 경찰서로 갑니다. 이 장면에서 잠시 뜨악했습니다. 바로 전에 읽은 『종신 검시관』에서 가장 중시한 건, 현장보존이거든요. 근데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의 시작 장면은 현장 훼손이거든요. 이 소설은 현장보존과 논리적인 추론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기존의 추리물과 상당히 다릅니다. 1950년대 나온 책이지만,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매력적입니다. 더 이상 말하는 건 스포일러겠죠? 아무려나 추리형식부터 재판과 처벌 등에 관해 매우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소설입니다.
제임스 시겔의 『탈선』을 읽었습니다.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주인공이 기차에서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바람을 핍니다. 근데 그 장면이 어떤 범죄자에게 들키고, 이후 협박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끔찍합니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묘사와 몇몇 장면은 끔찍해서 차마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소설 뒷표지엔 ‘충격적인 반전의 연속’, ‘최고’ 등 갖은 찬사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찬사가 현란할 수록 실체는 현란한 수사를 못 따라 간다는 걸, 이 책은 매우 잘 증명합니다. 물론 추리소설로서 재미는 있습니다. 심심할 때 한번 읽어도 무방하겠지요. 하지만 전 이미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소설을 읽었는 걸요. 현란한 소설적 장치, 복잡한 구성 같은 거 없이도 훨씬 빼어난 반전과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소설은 지나치게 복잡해지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하긴 …. 추리소설의 기본 아이디어는 이미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다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어쩔 수 없겠죠.
아무려나 추리와 소설의 형식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걸 고민해서 뭐하죠? 흐흐.
가쿠다 미쓰요의 작품 중에는 <죽이러 갑니다>라는 단편집이 기억에 남아요. 뭐랄까, 일상적인 미움과 살의에 대해 끔찍하지 않은 선에서 그린 점이 마음에 들었달까. 가쿠다 미쓰요는 다작하는 작가인 만큼 작품의 성격이나 수준이 들쭉날쭉해서 난감할 때가 있어요.
루인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군요. 저도 좋아하지만 ㅋ
그런데 왜 예전에 쓰던 픽션은 결말을 안 내는 거예요? ㅎㅎ 추리와 소설의 형식을 고민한 이유는 혹시 그걸 끝내기 위해서? ㅎㅎ
아하하;;;;;;;;;;;;;;;;
왠지 지하 30미터에 파묻은 기억을 손쉽게 꺼낸 느낌이랄까요? ㅠ_ㅠ
예전에 쓴 픽션이 뭐였을까? 룰루랄라~ (딴청하기 ;; )
텐텐은 영화로 봤어요. 오랫동안 기억될만한 작품이었죠. 책이 약간 진부했다는 말엔 상상이 되요. 영화로는 좋지만 그걸 책으로 읽었다면 좀 그랬을 거 같아요. 루인님은 책을 빌려주시기도 하시나요? 그렇다면 강추하는 두 권의 추리소설을 빌려읽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요.. 크크.. 긴 겨울밤 침대속에서 독서를.. 크크
이 겨울, 침대 속의 독서는 너무 즐거워요! 헤헤. 재밌게 읽으세요. 🙂
흠…’종신 검시관’이란 책에 끌리는데요?
추리소설 최고 >_< 다음에 한국가면 서점에 가서 고민 안해도 되겠네요 ㅎㅎ
종신 검시관은, 기본에 충실해서 재밌는 거라… 오히려 별로 일 수도 있어요;;; (급소심모드… 하하. ;; )
걱정 마세요 ㅎㅎ
책을 직접 봤을 때, 제 나름의 기준을 충족시켜야만 사기 때문에, 제가 그 책을 구입하고 싫어할 확률은 극히 낮을 뿐더러, 그쯤 되면 루인님의 책임은 제로%라고 할 수 있어요 ㅎㅎ
흐흐. 그럴 거라고 믿으면서도 혹시나 해서 걱정이었달까요? 흐흐. 아, 아님 나중에 서울에 들리면 제가 빌려드릴까요? 에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