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신분과 계급을 뛰어 넘는 사랑이야기의 계급질서 유지 효과 관련 트윗을 @junuak와 잠깐 주고 받았다. 그러다 며칠 전 가네시로 카즈키의 책 두 권, [레벌루션 No.3]와 [연애소설]을 읽으며 가진 어떤 의구심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달까.
가네시로는 재일한국인 경험을 주로 쓰는 작가로 알고 있었다. 이런 편견으로 읽은 책 두 권은 다소 낯선 느낌이었다. 재일한국인이 등장하고, 차별과 울분을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가네시로 자신이 밝혔듯 재일한국인 20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민족의 소속이 아니라 연애라고 했던가. 이 말처럼, 두 소설은 모두 연애소설이다. 그 자신은 [레볼루션 No.3]는 모험담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연애소설의 모험담 버전에 가깝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성애 관계를 설명할 때 화자는 애인에게 막노동을 한달 내내해서 반지를 사줄께,라거나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갈게,와 같은 이성애 규범의 남성판타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물론 [레벌루션 No.3]와 [연애소설]의 이성애 관계는 상당히 다른 면이 있다. [레벌루션 No.3]에서 화자는 동성(으로 여겨지는) 친구에게 안기고 싶다는 표현을 빈번하게 한다. 집단문화마다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동성(으로 여겨지는) 친구들끼리 사랑한다는 말도 심심찮게 하고. 그러면서도 규범적인 이성애 욕망을 충실하게 실천한다. 그래서 [레벌루션 No.3]의 화자가 말하는 이성애는 분명 규범적인 형태의 이성애지만 이성애관계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반면 [연애소설]에서 화자는 신분과 계급, 시간을 뛰어 넘는, 마치 죽음을 걸고 이루는 이성애 연애란 환상을 갈구하는 느낌이다. [연애소설]에 실린 세 편의 작품 모두, 역경을 이겨낸 이성애사랑을 다루고 있달까. 그래서 두 작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내겐 [레벌루션 No.3]와 같은 방식이 흥미로우니까. 아무려나, 이런 차이에도 이성애 규범에 대한 남성판타지를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려나 이 두 권을 읽으며 흥미로운 부분은 과거의 사랑을, ‘역경을 이겨내고 이룬 사랑’으로 묘사하는 점이다. 마치 과거의 사랑은 어떤 역경을 이겨낸 사랑이라면 현재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듯. 저자는 과거의 사랑처럼 죽음, 신분과 계급 차이와 같은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며 사랑을 이루는 그런 관계를 이루고 싶다는 듯.
@junuak의 지적처럼, 이건 분명 신자유주의의 기획이고, 계급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과거엔 신분, 지금은 재력과 출신학교가 계급인 사회에서, 각 집단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결코 섞이지 않도록 하려는 기획. 과거의 사랑 전설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이야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지독한 희망고문.
근데 과거엔 정말 신분 혹은 다른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는, ‘(무려)뛰어 넘는’ 그런 사랑이 있긴 했을까? 어쩌면 과거엔 이런 사랑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현대의 신화가 아닐까? 과거엔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 환상 자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관련 논의를 다룬 글이 있으려나요? 아신다면 추천 부탁…)
뭐, 이런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랑이 뭘까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사랑이 뭔지 나이를 이만큼 먹어도 모르겠네요.
좋아한다는 이해하기 쉬운 말이 있는데 왜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걸까요?
제가 보기엔 의미가 겹치거든요.
사랑이 뭔지 알 수 있는 나이는 영원히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냥 경험이 쌓일 뿐..
근데 정말 약간의 배타적인 관계만 제외하면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하는 감정의 간극은 참 애매하기도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