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 만에 쓰는 독후감. 다른 책은 귀찮아서 못 쓸 듯… 크크. ;;
수지 오바크. [몸에 갇힌 사람들] 김명남 옮김. 파주: 창비, 2011.
이 책은 정신분석학자 오바크가 사례를 통해 몸-경험과 인간 주체성 형성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ㄱ. 우선 번역 제목을 잘못 정했다. 오바크는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몸에 ‘갇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몸에 갇히다’란 개념은 몸과 정신 이분법 혹은 몸이라는 어떤 물질성과 이 물질성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저자는 이런 이분법을 비판한다. 몸의 역사적 경험이 개인의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몸’이 곧 ‘나’다. ‘몸에 갇히다’와 같은 표현은 저자의 주장과 충돌한다. 물론 이런 이분법을 받아들인다면 잘 정한 제목이다. 몸에 갇혔다고 얘기할 정도로 인간은 몸-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번역 제목의 문제는 일정 부분 저자가 초래했다.
ㄴ. 저자는 어릴 때 어머니와 겪은 몸 접촉이 자아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양육인, 대체로 어머니가 아이를 기르며 느끼는 미세한 감정이 몸을 통해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얘기한다. 언어를 통하지 않더라도, 꼭 껴안는 과정에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엔 동의한다(이것이 새로운 주장도 아니거니와). 우리는 언어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고 언어가 아니라 몸에서 번져나오는 기운을 통해 더 많은 ‘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째서 아이의 맥락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을까? 양육인 혹은 어머니의 경험은 어디 갔을까? 그리고 아이는 그 경험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인 걸까? 흥미롭게도 저자는 어머니의 불안은 그의 어머니에게로 원인을 넘기면서 설명한다. 이것은 결국 기원서사로 가려는 것일까? 물론 저자는 기원서사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지금 내담자가 겪는 심리적 어려움을 예방하기 위해 혹은 자녀의 정서를 위해 양육인은 거의 언제나 완벽한 감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일까? 완벽한 감정 상태는 무엇이지? 그리고 양육인은 얼마나 더 많은 양육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아울러 아이는 양육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연기할 뿐인 걸까? 오바크는, 양육인이 아이에게 원하는 어떤 감정이 있으면 아이는 양육인의 요청에 맞춰 감정을 표현하고, 그러다보면 아이에게 연기가 일상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는 이렇게만 반응하는 것이 아닐텐데… 오바크의 주장은 흥미롭지만 틈이 너무 많다.
ㄷ. 책의 첫 번째 사례는 몸변형에 관한 것이다(BIID로 부른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자르고 싶어 한다. 자신은 허벅지가 있어 불완전하며, 허벅지를 잘라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바크는 그의 욕망을 트랜스젠더의 성전환과 연결해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한다. 다리를 자르려고 하는 욕망의 원인으로 어릴 때 겪은 사건을 추적한다. 여기까지는 정신분석학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오바크는 신체변형과 관련해서 정확하게 어떤 입장일까? 물론 저자의 입장을 추궁할 이유는 없으며, 반드시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뭔가 묘하다.
오바크가 글을 잘 쓴다고 느꼈다. 글이 끝날 때까지 하지 않은 한 마디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란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했다면 당장 책을 덮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뉘앙스는 묘하다. 뉘앙스는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를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느낌이기도 하다. 저자는 안정된 몸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전지구화 시대의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몸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이것은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와는 다른 주장이긴하다. 하지만 얼마나 어떤 식으로 다른 주장인 것일까?
책을 읽으며 당황했던 점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저자의 해석 방식이다. 오바크의 요약을 다시 요약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론 맞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안정된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고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안정과 불안정의 경계를 누가 정하느냐고 질문한다. 이를테면 이성애 정체성은 사춘기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정체성이지만, 비이성애 정체성은 사춘기 시절 일시적 감정이라고 얘기하는 일군의 무리가 있다. 이런 이분법에 대한 문제제기로, 동성애도 안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과 불안정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안정이란 것이 가능하긴 하냐고 질문한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안정이 이런 맥락이라고 알고 있다.
아울러 BIID나 성전환과 같은 몸 변형 실천은 자기 욕망이기도 하지만, 몸의 규범성을 누가 결정하는가를 질문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소위 ‘사지 멀쩡한 몸’이라는 인간 신체 규범, ‘남자라면’ 혹은 ‘여자라면’이라는 언설을 통한 섹스-젠더 규범은 나의 욕망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바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욕망일 수도 없지만 내 욕망이 아닐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몸 변형 실천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지배규범이 유일한 규범, 상상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오바크는 책 말미에 “몸을 당연한 것이자 즐거운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몸에 새로운 육체성을 부여함으로써, 몸을 우리가 달성해야 할 열망이 아니라 우리가 깃들여 사는 장소로 바꿔야 한다.”고 얘기한다. 이것은 오바크 자신의 주장과 충돌하는 문장이다. 지배규범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몸을 살기 위해 오바크는 이렇게 말한 듯하지만, 글쎄… 꼭 이런 식으로 결론을 내렸어야 할까? 지향성 자체가 지배 규범인 상황에서, 지향하지 않으려는 지향성을 모색할 수도 있겠지만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순 없었을까? 물론 오바크 식의 제안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D의 제안으로 읽었는데.. D와 다른 책을 읽은 것 같아.. ;ㅅ;
이 책은 읽을수록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 기묘한……;
오바크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도……
오바크가 어머니와의 경험에 집중하는 것은 정신분석 상담자이기 때문이겠죠? 이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의 맥락만 다루지 않나요? 만약 어머니의 경험을 다루려면, 아이와의 관계가 아니라 다시 어머니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겠죠. 암튼 전 이 방식이 싫지만, 거의 항상 그렇게 하더군요.
이 책을 읽고 정리가 안 되는 게 많았는데 루인이 이야기를 해주니 고마워요. 되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그냥 그런 의문들을 가지게 해준 것이 이 책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ㅋ
저만 그런 것이 아니었네요.. ;;;
전 읽다보면 시작은 이런 얘기가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다가 결말에 가선 또 왜 저런 얘기를 하지.. 싶었어요..;;
정말이지 모든 것(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이 어머니에게서 시작한다는 설명은 좌절스러울 뿐이에요… oTL..
그나저나 정말, 이 책의 의미는 여러 고민을 하게 한 것이에요.. 크크. ;;;
신체불안정화 사례에 환상사지와 트랜스젠더, 성형중독이 뭉뚱그려 나와 있었는데, 이걸 모두 disorder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루인님 말씀대로 저도 저자가 얘기한 양육에서의 경험을 강조하는 결론이 일반적인 어머니 책임론과 뭐가 다른가 그런 생각이…
그쵸? BIID, 환상사지, 트랜스젠더, 성형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맥락은 있는데, 저자는 이를 모두 치료의 대상으로 혹은 어쨌거나 풀어야 할 문제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정신분석이 꼭 이런 식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더라고요.
도대체 엄마들은 얼마나 완벽한 존재여야 할까..라는 고민을 했어요.. ;ㅅ;
아, 그리고 동거묘 바람을 안거나 쓰다듬으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할 때가 있는데, 혹은 라디오를 듣다가 울컥할 때도 있는데. 이 모든 감정이 바람에게 전달되는 거라면… 덜덜덜.
저만 그 책 읽고 불편했던 게 아녔군요. 사실 저도 리뷰를 썼지만 걍 비공개로 포스팅했어요. 좀더 생각해보고 수정해서 올리자고 했다가 그냥 방치. -_-;
첨에 책 읽었을 때 느낌은, ‘와, 이 사람이 말하는 이런 어머니가 되려면 아주 죽어나야겠구나’였어요. (나중엔 반여성적이라고까지 느꼈;;;).
상처 입거나 이미지에 침투당한 결과로써의 신체불만족을, 성별을 다르게 느끼는 심리와 같은 선상에 놓는 게 말이 되나, 트랜스섹슈얼 욕망이 ‘감정적 상처를 몸에 반영하고 싶다’ ‘남들의 관심을 끌고 싶다’는 식의 심리에 기인하진 않을 텐데, 뭐 그런 생각도 들고.
(유년시절의) 상처와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세뇌의 측면에서 볼 때, 성형.미용을 향한 욕망으로 말할 거 같으면 앤드루의 다리 절단 욕망과 같은 실에 꿰겠는데 트랜스섹슈얼은 숫제 다른 이야기 같더라고요. 지식이 짧아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대충 그랬던.
루인님의 독후감을 읽으니 좀더 가닥이 잡히네요.
그쵸? 정말 오바크 식이라면 어머니는 인간이길 포기해야 할 거예요. 이제 막 아이를 낳은 이가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괴롭겠구나 싶고요.
아무리 정신분석학자라지만 아이를 하얀 종이로 여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사회적 경향과 개인의 실천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문제도 있지 싶고요..
암튼 조금은 기대하고 읽었는데 많이 아쉽달까요… 그나저나 비공개 님의 리뷰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