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슈와 관련한 역사를 읽노라면 관점과 입장은 이전에 비해 개선은 되어도 진화하진 않는다. 관점은 진화하는 게 아니라 경합한다. 어떤 시기엔 ㄱ이란 논의가 우위를 점했다면 다른 시기엔 ㄴ이란 논의가 우위를 점할 뿐이다. 그러다 또 다른 시기엔 그 모두를 비판하는 입장이 등장하고. 그런데 이것을 진화 담론으로 이해하는 순간, 과거의 흔적과 논의를 놓친다. 이를 테면 트랜스젠더 범주를 의료적으로 접근하고 의학적 조치를 취함에 비판하는 입장은 근래 서구 트랜스젠더 운동과 이론적 논의가 활발히 등장한 1990년대 이후부터 가능했던 게 아니다. 미국의 경우, 미국 내에서 적법한 의료적 조치가 가능하지 않았을 때도 트랜스젠더의 의료화/병리화를 비판하는 움직임은 존재했다. 그 입장이 그 시기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또 그 시기의 병리화 비판이 지금과 같은 차원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논의가 쌓이면서 더 섬세하고 또 정교하게 변하긴 했다. 즉 관점과 입장의 역사에선, 어떤 변화는 있어도 진화는 없다. 과거엔 인식 수준이 낮았는데 지금은 아니더라는 식의 접근은 정말 곤란하다. 역사 없는 혁신은 없다. 버틀러의 젠더 논의 역시, 내가 어느 글에서 기술했듯 다른 많은 논의가 축적된 지형에서 가능했다.
‘진화하는게 아니라 경합한다’는 구절에서 혼란스럽게 느껴졌어요. 무심코 진화론을 떠올리며 읽었는데, 그렇다보니 진화와 경합이 무슨 차이인지 선뜻 생각하질 못해서요;
말씀하신 내용을 읽고 나니, 저도 진화와 경합이 헷갈리네요..;; 진화가 경합과정이니까요..;;
그러면서 깨달았는데 소위 진보사관의 진보라고 적어야 하는 걸 진화로 잘못 적었다는 걸 깨달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