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삶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루인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상상력과 용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리적인 삶이 문제적이란 기술 보다는 그런 다른 생활이 창조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살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내용을 좋아한다. 뭐, 당연한 얘기;;;
루인의 삶이 병리적이라는 의미는 아닌데, 이는 종종 자신의 삶이 병리적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특별함을 위한 훈장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루인의 삶은 병리적인 편이다.
예전에 스티비 원더가 10분 정도 밖에 “볼 수” 없어도 “개안”수술을 하겠다고 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이유는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단 10분이나마 딸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언어는 비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구성된 경험이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 의하면 태어났을 때부터이든 사고를 통해서든, 시각’장애’인이 “개안” 수술을 했을 때, 시력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데는 최소한 한 달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리며, 경우에 따라선 우울증 등의 이유로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수술을 하고 붕대를 풀면, 금방 “볼 수” 있을 거란 믿음은 시력은 경험이 아닌 타고난 것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아기들에게 모빌 같은 것을 통해 시력 훈련을 시키지 않으면 동공이 고정되거나 해서 “문제”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이처럼 시력은 철저하게 훈련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력훈련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시력경험을 잊은 사람이 붕대를 풀자 금방 상대를 알아본다는 설정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환상, 즉 거짓이다. 시각’장애’인은 “장애”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경험에 익숙한 사람들과는 다른 식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며 시각을 사용하는 사람과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지금의 세상이 시각에 기반 해서 구성되어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시각을 사용한다는 것도 문제적인 말인데 시력 차이, 색맹이나 색약이냐에 따라 다른 식으로 세상을 경험한다. 그것은 현재 사회가 설정하는 방식과는 다른 식으로 색깔을 인식하기에 경험하는 세계가 전혀 다르다. 루인은 아무 고민 없이 빨간 색 보다는 파란 색의 명도가 더 진하겠거니 했는데, 색맹의 입장에선 빨간색은 검은색의 명도와 별 차이가 없으며 파란색은 상당히 밝게 다가오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거의 흰색처럼 보인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루인은 루인을 시각’장애’인으로 명명했는데,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장애’라고 느끼지 않았거나 그렇게 명명해야겠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장애’를 “나”와는 상관없는 멀고 먼 남의 얘기로 여기며 타자화/특수화하는 폭력이다. 동시에 ‘장애’란 것이 얼마나 임의적인 것인가를 의미한다.)
정상/비정상이란 구분은 임의적인데 그것은 정상을 통해 비정상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을 발명함으로써 정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내가 정상”이니까 “네가 비정상”이 아니라 “넌, 비정상이야”란 인식을 통해 “나의 정상성”을 획득한다. 누군가의 말에 대해 “그건 인종차별이야(동성애 혐오야)”란 발언을 함으로써 자신은 인종차별적이지 않다, 동성애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보이게” 하거나, 적어도 그런 비판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상/비정상 담론은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비록 올리버 색스의 책 속엔 때로 정상/비정상 담론의 틀로 기술하는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떻게 비정상을 발명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폐증이 문제인지 자폐증을 문제로 여기는 세상이 문제인지, 책을 읽으면서 혼란을 느꼈다. (흔히 자폐증이란 말보단 자폐아란 말을 더 많이 쓰는데, 그럼 자폐증을 가진 성인은 어디로 갔다는 걸까?)
뭐, 이 책을 읽으며 대충 이런 얘기들을 중얼거린다. 사실,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들을 더 읽고 제대로 서평을 쓰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지금껏 쓰지 않고 있는, 항상 몸속에 가두고만 있던 언어들을, 이 책을 매개로 풀어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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