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일, 아침마다 알바 출근을 하며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빠지는 날도 있었지… 빠지는 날이 없으면 성실함이라도 칭찬하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심드렁하달까..) 거리에서 전도하는 사람을 지나친다. 그의 앞엔 어김없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적혀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구절은 쓰일 수 있고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김밥천국 예수지옥”이란 구절은 드물게 농담으로는 할 수 있어도 널리 쓰이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 정치학의 윤리가 있다고 믿는다.
가끔 특정 세력이 만든 정치문구의 깔끔함에 감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니 참 간결하잖은가. 하지만 이런 구절은 삶의 복잡함을 사유하지 않을 때, 단 하나의 목적 지향과 그 목적에 모두가 동참해야 한다는 당위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믿을 때 가능하다. 예수천국과 불신지옥은 예수와 예수 아닌 것(즉 불신)의 이원론에서만 성립한다. 이원론, 이분법, 즉 모든 것을 둘로 나누고 위계가 분명하며 위계에 따른 가치와 도덕이 명확한 세계에서만 이런 언설을 할 수 있다.
만약 삶의 복잡함을 사유한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같은 언설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김밥천국 예수지옥”이란 구절도 불가능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지옥에 가길 원하는 정치학 역시 삶의 복잡함을 사유하지 않는다. 삶의 복잡함을 사유하는 정치학은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보다는 복잡한 지점을 복잡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보수-진보와 같은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삶의 복잡함을 사유하는 정치학에선 깔끔한 정치문구를 만들 수 없다. 그 문구를 끊임없이 반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여라도 탄생한 문구는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성찰과 사유는 요구해도 단편적 자극은 주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의 복잡함을 사유하는 정치학이 쉽게 유통되기 어려운 게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다가도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 지금 유통되는 많은 언설이 삶을 사유하고 성찰하도록 하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찰과 사유를 요구하는 문구 역시 널리 유통될 수 있다. 이런 문구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
이렇게 진부한 얘기를 하다니.. 바이트 낭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