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때 쓴 쪽글입니다. 나이든 여성과 관련한 글을 써오라고 했는데, 트랜스젠더 중 나이든 여성이 누가 있을까 하니 김비 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더군요. 김비 님의 실제 나이는 많지 않지만 트랜스젠더 공동체에선 대선배랄까요. 그래서 관련 글을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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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11.15. 화. 15:00- 여성, 나이듦, 노동.
김비, 그녀의 이야기
-루인
1971년생, 이제 사십 초반의 그녀를 ‘나이 들었다’고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계시간의 세계에서 나이 마흔인 사람에게 나이들었다는 말은 실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트랜스젠더에게 혹은 나에게 대선배로, 매우 오랜 시간을 산 존재로 인식된다. 거리와 시간 개념이 맥락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구성되듯(필립스, 73) 트랜스젠더의 삶에서 나이 든 존재는 시계시간의 개념으로 얘기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존재의 역사성과 시간성이 나이 개념을 구성한다. 어떤 집단의 사람에겐 일흔 혹은 여든은 되어야 나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이 예순인 사람에게 나이 들었다고 얘기하면 역정을 들을 수도 있다. 나이듦이란 그런 거다. 많은 이론가가 지적하듯, 나이듦의 의미와 시계시간의 표지는 일치하지 않는다. 범주에 따라, 집단에 따라 나이의 의미는 달리 구성된다. 그리하여 김비, 그녀는 시계시간으론 여전히 매우 젋지만 mtf/트랜스여성에겐 혹은 트랜스젠더에겐 ‘나이 든’ 존재다.
1990년대부터 그녀는 다양한 글을 쓰며 트랜스젠더를 가시화했다.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트랜스젠더의 삶과 기본 지식을 알렸다. 때론 미디어에 출연해서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야기하며 어떤 인식을 만들고자 했다. 그녀의 삶과 실천은 하리수 씨처럼 이 사회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인식론적 전환을 야기하는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적잖은 이들에게, 특히 mtf/트랜스여성에게 그녀는 신화다. 지금 시간에 김비를 만난다는 건 신화적 존재를 만난다는 것과 같다.
1990년대부터 LGBT 인권운동이 본격 전개되고 그 유산이자 흐름에서 지금의 LGBT의 삶이 구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LGBT가 기억하는 역사는 1990년대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은 역사 이전의 시대처럼 여전히 막연하고 정확한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지금도 그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이것은 트랜스젠더의 집단이 형성된 시기가 짧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집단의 형성 시기와 무관하다. 집단의 형성 시기가 길어도 나이가 들면 사라져서 특정 나이부터는 만나기 힘든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사라지지 않고 어떤 집단/범주의 선배로 남아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 선배가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한다면 이것은 더 좋은 일이다. 그녀는 신화지만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존재다.
나이 든 mtf/트랜스여성이 할 수 있는 일엔 무엇이 있을까? 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여성은 업소 마담이나 작은 가게 운영, 혹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가사노동만 하는 ‘평범한’ 삶을 얘기한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트랜스젠더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디어에서 유통하는 트랜스젠더의 이미지와 미래 역시 연예인이거나 성판매 업소의 노동자 정도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기가 힘들다. 나이 들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어떤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지에 있어 모델이 없는 상황(스쿠차 & 버나드, 53-55)일 때 삶은 언제나 막막하다.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언제나 최초거나 1세대에 해당한다면 이것 자체로 자유로운 만큼이나 불안하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김비, 그녀의 현존은 어떤 안도감을 준다. 그냥 살면 되는구나… 일단 살면 되는구나…
한때 영어학원의 강사로, 지금은 소설가이자 작가로 살아가는 김비의 삶은 내게 어떤 희망이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곳으로 이주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나는 미디어 혹은 소위 말하는 대중이 요구하거나 이해하는 식으로 살지 않아도 괜찮고 나의 미래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걸 확인한다. 그녀는 내게 그런 안도감을 주고 그런 자신감을 준다. 그녀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을 떠올리며, 나는 트랜스젠더에게 그리고 내게 나이듦의 의미,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일의 의미가 기존의 관념에 따를 필요가 없음을 확인한다. 우리-트랜스젠더는 나이 마흔에 조로한다는 뜻이 아니다. 역할 모델을 새롭게 만들고 있는 시점에서 기존의 나이 개념, 일 개념은 전혀 다르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왜 ‘우리’에겐 나이 여든의 모델이 없을까,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고 쉰, 예순의 나이를 먹는다는 건 트랜스젠더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질문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이나 굳이 기존의 나이 개념에 따른 모델 관념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겐 나이 마흔의 그녀가, 나이 여든의 누군가처럼 든든하고 또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밑절미다.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짝지에 관한 글 감사합니다^^루인님에게도 행복한 2014년 되시길^^ 오늘은 짝지랑 1499일째 되는 날입니다~~ 1600일까지 재미있게 잘 살께요~~ 고마워요^^
김비 님껜 제가 고마운 걸요!
오오 축하드려요! 1600일 뿐만 아니라 더 긴 시간, 두 분이 원하는 동안 재밌게 살길 바랄게요. 헤헤.
새해에도 행복하시길 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