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마지막 날 연세대학원신문에서 원고 청탁 메일이 왔습니다. 한 달 뒤인 3월 말에 발간될 신문에 실을 원고를 청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쓰지 않을까 했지만 분량이 부담 없었고, 올해 연극을 보러 갈 일이 많아서 연극비를 벌어야 했기에 쓰겠다고 했습니다. 마감 요청일에 맞춰 원고를 보냈고 3월 말에 신문이 나오면 우편으로 보내주겠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연세대 근처를 지나가다가 그냥 연세대학원신문을 챙겼습니다. 청탁 받고 기고한 원고는 실려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실수로 못 본 건가 해서 E에게 확인을 부탁했는데 없었습니다. 제 원고가 누락된 이유를 듣지 못 했습니다. 신문이 나오기 전, 제 원고를 싣지 않겠다고 결정했을 텐데 그와 관련한 어떤 연락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이 배포된 날(로 추정하는 날)에서 일주일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제가 먼저 이유를 묻는 메일을 보내진 않았습니다. 제가 사유를 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전 그 설명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지요. 신문이 나오고(발행일은 3월 28일) 일주일이 더 지났지만 아무런 연락이 안 왔습니다. 아마 제 글이 별로여서 싣지 않기로 했을 겁니다. 네, 제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제 글이 별로여서 그랬을 겁니다. 그 평가를 제 블로그에 방문하는 분들께 받기로 했습니다. 즉 저는 원고 청탁의 기획의도 및 제가 청탁받고 쓴 원고를 블로그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기획의도===
이번 호 <prism>에 “동성애 운동”에 대한 선생님의 글을 실을 수 있을까요. ‘러쉬 코리아의 동성애 지지 캠페인’을 주요한 사례로 다루고, 캠페인 위주에 멈춰 있는 한국의 동성애 운동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성찰이 담긴 글을 싣고 싶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최적의 필자임은 두말할 나위 없을 테고요.
그럼 한눈에 파악하실 수 있도록 부족하나마 기획의도를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동성애 운동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해마다 뜨거운 이슈가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소모적인 논쟁에만 그쳐 왔다. 소치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러시아의 반(反)동성애법이 통과되었을 때에도 국내에서는 러쉬 코리아만이 반대 캠페인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소수의 집회가 있었을 뿐, 동성애 운동은 아직도 ‘그들만의 움직임’ 혹은 커밍아웃 등의 스캔들에만 그쳐 있다.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유독 동성애 문제에 관해서는 논쟁이 소모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바로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담론이 아직도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또한 앞으로 이러한 상태를 유지한다면 동성애 운동이 직면할 한계에 대해서도 예측할 수 있다. 동성애 운동이 앞으로 사회적 의식의 변화를 이루고 의식의 진일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녀야 하는지 알아보자.
===제가 투고한 원고===
퀴어를 중심화하여 중심을 퀴어화하기
-루인(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runtoruin@gmail.com )
2014년 2월 한국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에 두 가지 주요 행사가 있었다. 물론 무엇을 주요 행사로 평가할 것인가는 매우 논쟁적이며 이 작업은 그 자체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하지만 내가 고른 두 개의 행사가 2월의 주요 행사라는데 크게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자,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로 그 행사를 떠올리고 있을까? 아니면 2월에 있은 더 많은 행사를 떠올리며 그 중 무엇을 꼽을지 고민하고 있을까? 어쩌면 당신은 지난 2월 LGBT/퀴어 관련 무슨 행사가 있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혹은 러쉬코리아가 러시아의 동성애선전금지법에 반대하며 진행한 행사를 떠올릴 지도 모른다.
트랜스젠더 연구활동가인 나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2009년부터 매년 1-2월에 진행하고 있는 퀴어아카데미와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이 2008년부터 기획하고 진행하는 LGBT인권포럼을 꼽고 싶다. 두 행사는 모두 현재 한국 LGBT/퀴어 활동가와 연구자가 모여 각자의 고민과 지식을 공유하는 자리며 현재의 정치 상황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과 연구 주제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다. 예를 들어 지난 2월, 우리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세를 넓히고 있는 보수 우파의 움직임과 퀴어포비아, 퀴어살인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살피고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우리는 LGBT/퀴어 운동의 20년을 공유했고 적잖은 LGBT/퀴어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배울 수 있었다. 현재 한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퀴어 이슈를 (개괄적으로나마)배우며 ‘내’가 알던 지식을 재구성하는 일 역시 이 두 행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두 행사가 다른 어떤 행사보다 중요한 이유는 운동과 연구, 삶과 앎/이론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글자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화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이 두 행사에 참석했거나 관련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정확하게 언제 진행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아마 이 글을 읽는 상당수는 두 행사를 처음 접했을 수도 있다. 달리 표현하면, LGBT/퀴어 이슈와 연구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지식, ‘가치’ 있는 앎으로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행사를 모르는 사람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 자체가 적기도 하다. 혹여 당신이 LGBT/퀴어 이슈에 낯선데도 2월에 있었던 관련 이슈 중 아는 것이 있다면 소치올림픽을 계기로 약간 알려진 러시아의 동성애선전금지법이거나 이와 관련한 러쉬코리아의 행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2월의 주요 행사로 꼽은 두 행사와 러쉬코리아가 진행한 캠페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단 세 개의 행사 모두 공적 행사였고 다양한 경로로 홍보되거나 알려졌다. 퀴어아카데미나 LGBT인권포럼은 공동체 내부자에게만 홍보하는 행사가 아니며 다양한 사람이 참석하는 자리다. 그렇기에 LGBT인권포럼엔 자신을 이성애-비트랜스젠더라고 설명하는 교수가 특정 세션 기획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차이라면 아마도 러쉬코리아의 행사만 주류 미디어의 관심을 끌었고 여기저기에 보도되었다는 점 정도다.
오해는 하지 말자. 러쉬코리아의 행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유명하건 덜 유명하건 특정 기업이 LGBT 이슈로, 혹은 퀴어 이슈로 행사를 진행하는 점 자체는 분명 매우 중요하다. 이 작업은 이제까지 LGBT/퀴어 이슈에 관심없던 사람에게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있는 행동이다. 특히 다국적 기업이라고 해도, 외국에서와 달리 한국에선 LGBT/퀴어 이슈에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러쉬코리아의 행동은 상당한 용기기도 하다. 이 일엔 충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이 러쉬코리아의 캠페인을 기억하길 바란다. 하지만 만약 러쉬코리아 혹은 특정 브랜드나 회사에서 진행한 행사 정도가 최근 한국의 LGBT/퀴어 운동 및 행사의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면(지금 이 글을 위한 원고청탁서에 이런 평가가 적혀 있기도 했다)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 기업의 행사가 LGBT/퀴어 운동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키지 않는다. 미디어에 노출되건 되지 않건, 더 많은 사람이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운동을 지속하고 이론을 생산하는 LGBT/퀴어 활동가, 연구자, 혹은 연구활동가의 노력이 운동을 지속시키고 세상을 바꾼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LGBT/퀴어 연구활동가의 지속적 활동이 없(었)다면 러쉬코리아가 진행한 캠페인도 불가능하다. (보수적으로 잡아서)1990년대 초부터 LGBT/퀴어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기에 지금 러쉬코리아가 러시아의 동성애선전금지법을 비판하는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었다.
러쉬코리아나 주류 미디어가 보도하는 수준에서 한국의 LGBT/퀴어 운동을 평가함은 기존의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으로 퀴어 이슈를 ‘평가’함과 다르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을 밑절미 삼아 LGBT/퀴어 이슈를 논하는 것은 평가가 아니다. 이것은 기존 규범의 틀에 LGBT/퀴어를 포섭하는 행위며 이성애-이원 젠더를 밑절미 삼는 상상력으로 LGBT/퀴어를 박제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퀴어 연구가 운동이나 실태조사, 때때로 구체적 삶에 초점을 맞춘 논의를 전개하면 이론도 없고 깊이도 없기에 배울 것이 별로 없다는 비판을 듣는다(삶은 이렇게 무시된다). 퀴어 이론이 기존 논의와 인식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논의 지형을 생산하면 현실을 무시하는 개념 놀이라는 비난을 듣는다(앎은 이렇게 무시된다). 혹은 한국엔 LGBT/퀴어 운동을 별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퀴어 이론이 없다는 이야기도 꽤나 빈번하게 나온다.
나의 지적이, 혹여나 비판에 자격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지 않길 바란다. 그 반대다. 나는 누구나 모든 이슈에 개입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구나 비판할 수 없는 학문은 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판적 개입은 피상적 정보와 인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판적 개입은 일정 이상의 노력과 예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인식론적 전회를 전제한다. 그 자신이 L/G/B/T/퀴어의 어느 범주에 속한다고 해서 그의 비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이성애-비트랜스젠더라고 그의 비판이 무조건 그른 것이 아니다. 현재 사회의 지배적 규범(유일한 규범이 아니다)을 근거로, 그 규범이 주변화하는 삶과 앎을 평가할 때 문제가 된다. 이것은 기존 지식, 기존 지배 규범을 재강화하고 재생산하며 지속시키는 태도일 뿐, LGBT/퀴어 운동과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다. 바로 이런 태도가 LGBT/퀴어 운동과 이론을 “그들만의 움직임”으로 만든다.
나는 한국의 동성애 운동이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글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에서 LGBT/퀴어 운동과 이론의 한계를 비판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이성애-이원 젠더 규범의 맥락에서 LGBT/퀴어는 그냥 그 자체로 이미 한계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LGBT/퀴어 운동은 캠페인 정도가 아니며 새로운 이론과 담론을 생산하지 못 하고 있지 않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운동을 진행하고 다양한 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LGBT/퀴어 운동과 이론을 겉핥기 식으로 소비하고 논평하는 태도가 LGBT/퀴어 운동과 이론의 담론 지형을 제한하고 박제할 뿐이다.
아유! 어쩜 이리 글을 잘 쓰시나요!
고.. 고맙습니다!
이 글이 널리 읽혔으면 했는데… 아직까진 별 반응이 없나 봐요.
전 듣보니까욤~ 헤헤헤.
신경써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