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알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몸에 독이 쌓인다’고 중얼거렸다. 알바를 하면 그냥 사무보조 알바라고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진 않다. 단지 생계형 알바여서가 아니다. 공부하려고 대학원 입학했고, 대학원 다니려고 일을하다보니 공부를 못 하게 되는 악순환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하는 일에서 스트레스가 생기고 몸에 독이 쌓인다.
이를 테면 많은 전화를 내가 받는데 그 많은 전화의 상당수는 다른 사람이 기획한 일을 문의하거나 다른 사람이 기획했고 그로 인해 화가 난 사람의 전화다. 그렇게 수화기를 통해 전해오는 욕설과 분노를 내가 받아야 한다. 전화가 잔뜩 올 만한 일을 벌이곤, 다음날 휴가를 낸다. 전화는 폭주하고 담당자는 휴가고 폭주하는 전화의 짜증과 분노를 내가 받는다.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그 일을 하려고 고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그리고 알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나도 모른다, 내 책임이 아니다’고는 죽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공공기관이나 정부기관에 전화를 한 적 있고,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태도와 전화 돌려막기에 분노한 적 있지 않은가. ‘내가 담당자가 아니어서 나도 잘 모른다’고 답하는 순간, 납득하고 그냥 끊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훈계하고 분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걸 받아야 한다. 내가 왜? 모르겠다. 내가 책임지고 싶지도 않고 책임질 수도 없는 그 일을 내가 받아야 한다. 내가 왜? 나도 모른다. 그냥 내 몸에 독이 쌓인다.
정작 내가 담당한 일은 이것저것 복잡하게 꼬여서 진행이 더디다. 수정해야 할 것은 잔뜩인데 다른 정규직 담당자의 발언권에 내 담당 업무는 뒤로 밀린다. 그리고 또 전화가 몰리고, 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더딜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하루라도 빨리 수정하면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는데 계속 뒤로 밀리니 일처리가 더디다.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지. 그냥 몸에 독만 쌓아간다.
이 일을 한지 몇 년이 되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일 자체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돈 버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하지만 지금은 안 괜찮다. 갈 수록 짜증과 독이 몸에 쌓인다. 이 독을 어디에 풀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독은 누구에게도 풀어선 안 된다. 이 독을 받아 내야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도 사실상 효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관두지 않는 이상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관두면 되지 않느냐고? 내가 먼저 그만두면 위약금 200만 원 정도를 내야 한다. 그쪽에서 날 일방적으로 해고하면? 그냥 그런 거다. 어차피 이 사회에서 갑-을 관계란 그런 거다. 봉기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세상이다.
몸에 독만 쌓인 상태로 앞으로 몇 달을 더 견뎌야 한다. 내년엔 다른 일을 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좀 더 오래 할까 했지만 아니다. 더 오래 할 일이 아니다. 그냥 올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겠다. 이 일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으면 그냥 무난하겠다고 고민했다. 아니다. 이 일을 계속하면서 박사논문을 쓰다간 논문을 못 쓰고 내가 퍼지겠다.
… 요즘 컨디션이 많이 안 좋다. 어찌하여 비염과 목감기와 컨디션 난조가 함께 왔다. 관습적 인사에 선뜻 “괜찮아요!”(씽긋)란 말이 나오지 않는 나날이다.
E가 있어서 참 고맙고 바람이 있어서 다행이고 음악이 있어서 다행이다. 몸에 독이 쌓이는 상태에서 수업 중심의 공부만 하다보니 마냥 유쾌하지만도 않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글을 잔뜩 읽어야 독이 조금은 희석될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독이 몸을 타고 떠돈다. 이번 학기만 잘 버티면 될 텐데. 6월까지만 잘 버티면 어떻게 될 텐데. 언제까지만 버티면 어떻게 될 거란 바람을 참 오랜 만에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