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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할머니는 내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시기부터 노인성 치매였고, 그 전의 일은 정말 단편적 기억 뿐이다. 그럼에도 그때 이야기는 기억난다. 내용이 별것 아니기 때문일까.
버스정류장이 아닌 도로 한 곳에서(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시골에선 버스정류장 개념이 희박했다) 오랜 시간 버스를 기다린 사람을 버스에 태우는데, 그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치고 피를 보면 그를 제외하고 그 버스에 탄 사람 모두 죽는다는 간단한 얘기였다. 그 사람은 저승사자라고 했나 삶을 시험하는 존재라고 했나.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구석도 많다. 버스와 저승사자라니,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니다. 하지만 많은 옛날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는 그럴 듯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시골에서 버스를 탈 때면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다 잊었는데 며칠 전 갑자기 떠올랐다.
02
구글플러스의 경향신문 계정에 [버스44]와 관련한 글이 올라왔다.
1차 출처: https://plus.google.com/102809260248109943090/posts/eoNBMkp4i5b
관련 전문: http://goo.gl/TL6dkj
간단하게 요약하면, 버스에 강도가 들어 승객 모두 돈이 뺏기고 운전수는 성폭력피해를 겪는다. 이 와중에 단 한 명만 운전수를 도왔고, 운전수는 그를 버스에서 쫓아 낸 다음 버스를 타고 자살한다는 내용이다. 위 링크엔 더 자세한 얘기가 나와있다. 암묵적 동의, 관망 등의 윤리를 같이 논하는 영화인가 싶어 보고싶었는데 마침 누가 구글플러스의 댓글에 링크 주소를 남겨줬고 유튜브에서 볼 수 있었다.
Bus 44 – Award-Winning Short Film: http://youtu.be/CK4TUP0VKLY
(영어자막이지만 위에 주소를 남긴 전문을 읽고 단편영화를 본다면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강도와 성폭력, 주변의 침묵과 방관을 고민할 수 있을까 했지만 영화가 끝났을 때 나는 다른 이유로 섬뜩했다. 성폭력 피해를 겪는 운전수를 도와 주려고 애쓴 유일한 사람이자 버스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승객의 마지막 표정때문이다. 승객은 운전수가 고의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다른 승객과 함께 죽은 것(혹은 운전수가 자신을 돕지 않고 방관한 승객을 모두 죽인 것)을 알아채곤 씨익 웃는다. 그 웃음이 무서웠다. 운전수가 자신은 살려줬다는 걸 깨달았다면 그런 웃음을 짓긴 쉽지 않을 것이다. 사고의 애통함과 살아 남았음의 안도라는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떠오를 것 같은데 씨익 웃는 웃음이라니. 나는 그 웃음이 ‘성공했어’의 의미 같았다. 자신의 계획대로 다 죽었다는 성공의 의미 말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사건이 그 승객의 의도이자 기획이란 것처럼. 그리하여 이 영화가 공포인 진짜 이유는 누군가 피해를 겪고 있어도 방관하는 사람들의 태도, 방관한 사람과 같이 죽거나 그들을 죽이는 방식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웃는 표정의 미묘함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잊고 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03
그런데 나의 가치판단으로 운전수의 표정을 재단할 때, 운전수의 표정과 나의 가치판단은 또 다른 윤리적 이슈를 제기한다. 사고,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유일한 생존자라는 안도 사이에서 규정된 윤리적 태도란 어떤 것일까? 그러니까 나의 가치판단은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특정한 감정과 표정을 강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상황에선 살아남았다는, 누군가 나를 살려줬거나 구해줬다는 안도감의 기쁜이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글의 메모를 작성하는 시간에, 이건희가 삼성병원에서 심장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기사이 제목을 읽었다.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만약 수술에 실패하여 이건희가 삼성병원에서 삼성병원에서 죽는다면 삼성병원은 어떤 식으로 보도자료를 낼까? 이건희를 살렸다면 이것은 좋은 홍보자료가 된다. 하지만 못 살렸다면? 내게 이건희의 죽음은 딱 이 정도의 가치다. 이건희 자신이 만든 가치기도 하다. 다른 말로 모든 죽음이 반드시 애통한 사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버스44]의 마지막 장면을 섬뜩하다고 분석하는 것이 윤리적 판단이 아닐 수도 있다. 도덕과 윤리의 상대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특정 관계망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