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두 번째 쪽글입니다.
폭력 개념을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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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폭력문화비판과 감정의정치학.
비규범적 정치학의 ‘폭력적’ 실천을 위하여
-루인
벤야민, 발터. 「폭력비판을 위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서울: 길, 2008. 인쇄본.
6년 전인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매일매일 촛불을 든 집회가 열렸고, 어느 순간부터 경찰은 물대포와 체루액을 쏘는 등 ‘폭력’적으로 집회를 진압했다. 누군가가 주동한 집회는 아니었지만 법규를 지키면서 집회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공유한 태도였다. 그리고 경찰은 그 집회에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익히 알고 있듯 집회는 6월 10일, 절정에 이르렀다. 그날 아침부터 경찰은 세종로에 컨테이너를 쌓아 ‘명박산성’을 올렸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명박산성’은 당일 예고된 집회를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열릴 것이라고 예상되었기에 경찰의 진압 규모 역시 상당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명박산성’은 당일 예고된 집회, 그리고 당일 진행된 집회 자체를 막지 않았다. 거리엔 정말 많은 사람이 모였고 별다른 경찰의 저항 혹은 진압에 부딪히지 않으며 행진도 진행했다. 적어도 내가 참여했던 시간까지는 경찰과의 충돌이나 폭력적 진압은 없었다. 그리고 행진을 하면서 깨달았다. ‘명박산성’은 청와대로 가는 길을 차단하려는 목적이기보다 집회를 차단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음을. 그날의 집회와 행진은 컨테이너로 막아둔 길목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집회 자체를 차단하지는 않지만, 경찰 혹은 정부가 지정해준 장소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도록 했다. 사람들은 집회를 진행하고 정부는 안전하게 남겨졌다. 혹은 사람들은 시위를 하고 정부는 시위대의 시선 밖으로 벗어났다.
답답했던 것은 일부가 ‘명박산성’을 넘으려고 시도했고, 청와대로 행진할 것을 제안했음에도 대다수가 ‘명박산성’을 넘지 말 것을 주장했고, 넘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전후의 모든 집회에서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대응하며 ‘합법’적이고 ‘비폭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믿음이 강고했다는 점이다. 시위 참여자는 그 어떤 ‘폭력적’ 행동도 해서는 안 되고 ‘비폭력’으로 집회를 진행해야만 명분과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로선 상당히 갑갑했다. 청와대로 향하길, 민란이나 혁명이 변하길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읽고 있으면 이런 현상은 마치 자연법과 실정법의 대립 혹은 얽힘, 법정립적 행동과 법보존적 행동의 대립 혹은 얽힘처럼 읽히기도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의(정당성)를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며,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82). 즉 자연법은 목적이 정당하다면 그 수단이 매우 폭력적일 수 있으며, 실정법은 수단이 정당하다면 목적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경찰은 자연법과 실정법 모두와 관련있고,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모두 실행한다(95).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정당하다고 믿었지만 실정법의 논리에 따라 수단의 정당성을 통해 목적의 정당성을, 혹은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정당성 모두를 주장하려 했다. 혹은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의 태도는 기존의 (실정)법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법보존적이었고, 정부가 주장하는 새로운 ‘법’이 아닌 다른 어떤 ‘법’을 정립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정부의 관점에선 이 모든 것이 법질서 혹은 정부라는 체제를 위협하는 폭력이었지만, 집회 참가자는 ‘비폭력’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태도가 조금은 갑갑했다.
사회의 저항운동이나 지배 규범을 문제 삼는 비규범적 정치가 갈수록 법의 테두리에서 폭력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으며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루탄을 던지던 방식은 촛불 점화로 바뀌었고 거리 투쟁은 경찰과 모든 것을 조율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러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항으로서의 ‘폭력’, 정당한 대항 폭력마저 (부정적 의미에서의)‘폭력’으로 독해되고 있는 현재의 이해 방식이 고민이다. 노동조합의 ‘합법적’ 파업이 한국 사회의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심각한 폭력, 귀족 노조의 이권 다툼으로 인식되고 있다. 퀴어 정치학의 문제 의식이 불편을 야기하니 꺼내선 안 되는 언설로 취급될 뿐만 아니라 퀴어의 발언 자체가 폭력으로 명명되곤 한다. 이런 태도가 고민이다. 즉 폭력에 작동하는 권력 위계와 맥락이 사리지고 있는 현상이 고민이다. 벤야민은 법에 대한 비판이 “법질서 자체의 몸통과 사지를 반박하지 않고 개별적인 법률이나 법 관례들만 반박할 때” 이것은 “완전히 무력한 것”이라고 했다(93). 비슷하게 대항 행위나 저항 행위가 좀 더 강력하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폭력적’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 즉 수단이 부당하면 목적도 부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한계에 갖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란 고민을 하곤 한다. 저항과 항거의 방식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문제제기마저 실정법의 한계 내에서 이루진다면 비판으로서의 힘을 잃는 것은 아닐는지.
이런 고민에서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구분하는 벤야민의 설명은 상당히 흥미롭다.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신들의 단순한 발현”, “신들의 존재의 발현”(107)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신화적 발현들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직접적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과 … 동일한 것”(108)이며,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110)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이 지적을 오독해서, 법, 국가 혹은 지배 규범이 그 자신의 존재와 정당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수단이 폭력라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은 지배 규범의 작동과 비규범적 정치의 대립 혹은 맞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비규범적 정치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비규범적 정치는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지배 규범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비규범적정치는 죄를 면해준다(111). 신화적 폭력-신적 폭력과 지배 규범-비규범적 정치를 등가로 설명하는 것엔 분명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모든 폭력을 등가로 사유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폭력의 복잡한 결을 구분하는 사유는(지금 시대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또 다른 설명체계와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중요하게 사유할 측면이다. 무엇보다도 폭력이 폭력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112) 인간을 생명 이상으로(114) 이해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저항 정치에서 폭력의 위상을 반드시 다시 사유해야 한다. 모든 폭력을 등가로 이해하는 현재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것인가는 다른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