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자신의 파트너가 죽자 매주 무덤을 찾아 몇 가지 음식을 놓고 파트너가 살아 생전 좋아한 노래를 색소폰으로 부른다고 했다. 뭔가 뭉클한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다음 꾸준히 애도하는 행위는 사랑을 되새기는 작업인 동시에 고인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작업이면서 조금씩 지워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애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방부 처리될 수도, 동결 건조될 수도 없으며, 아마 이 사실은 애도하는 사람이 가장 확실하게 깨닫겠지. 그럼에도 꾸준히 애도하는 마음, 마음의 변화를 꾸준히 느끼는 시간은 소중하고 또 귀한 시간이다. 애도하는 시간은 충분할 수록 좋고, 3년이란 시간은 어쩌면 꼭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죽은 다음에도 젠더는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동성 간의 파트너가 죽어서 같은 묫자리에 나란히 묻힌다면 어떻게 자리를 배치할 것인지도 질문거리로 만들면 흥미로울 듯하다. 한국에서 사람이 죽은 뒤 납골당의 어느 한 칸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파트너와 한 자리에 묻히고자 한다면 묫자리의 위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이른바 ‘가족’납골당이어도 위치를 골라야 할 것이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즉 애도를 하는 사람이 보는 입장에서 남성은 왼쪽, 여성은 오른쪽에 묻힌다. 고인이 애도하는 사람을 보는 기준으로 하면 남성은 오른쪽, 여성은 왼쪽에 묻힌다. 이것이 한국의 장례문화며 일종의 문법이다. 두 가지 질문. 동성파트너는 각각의 위치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 위치가 젠더를 독해하는 근거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해석이 남아 있는 한에선 어떤 식으로건 이것을 교란할 방법을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 왜 우리의 삶은 죽어서도 젠더가 규정되고 다시 한 번 지정되는 방식이어야 하는가? 최소한 한국 문화에서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이원젠더의 틀에 규정된다. 이럴 때 묫자리 배치를 통해 젠더가 규정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가능한 방법은 납골당 안치(하지만 납골당에 안치해도 젠더가 표시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거나 법적으로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 것 정도겠지. 전혀 다른 장례 문화, 전혀 다른 납골 문화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나는 풍장을 하고 싶다. 연애 강박, 커플 강박인 사회, 그런데 오직 둘 만의 연애만을 자연스러워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에 문제제기 하는 방식은 유골함을 랜덤으로 배치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납골당에선 유골함이 랜덤으로(엄밀하게는 유골함이 안치되는 순서대로) 배치된다. 죽음, 장례문화에서 계급 이슈를 빼고 사유할 수도 없는데 유골함에도 계급이 존재한다. 사유할 거리는 무척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