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함과 만나는 취약함

둘도 많다는 말을 떠올렸다. 한편으론 맞는 얘기다. 오늘이 그랬다. 두 명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은 세미나가 되었다. 하지만 몸이 좋지는 않다.

참 이상한 징크스이다. 지금까지 총 8번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이때의 한 번은 일주일의 한 번이 아니라 새로운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것을 한 번으로 한 것, 그러니 한 권의 책을 다섯 번에 걸쳐 한다면 세미나를 한 번 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발제를 8번을 했는데 8번 세미나 전체를 다 한 것은 아니고 한 번은 하지 않았고 다른 세미나 때 발제를 두 번 했었다. 그리고 거의 항상 가장 신경 써서 준비한 발제일 때 마다 참가자가 유난히 적거나 발제가 취소되곤 했다. 다양한 영상까지 준비했던 발제가 사실 상 취소되었을 땐 타격이 커서 그 다음 세미나 땐 발제를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가장 욕심을 내서 준비한 발제일 때, 이렇게 되는 걸까. 많은 사람의 얘기를 듣고 싶은 바람은 루인에겐 과도한 욕망인걸까. 이런 불필요한 자학성 발언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런 몸이다, 지금의 루인은.

사실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그저 혼자서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해진 상태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괜히 함께 세미나를 한 사람에게 불똥이 튀었다. 죄송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다시는 발제를 하고 싶지 않은 몸이었다.

끝나고 여이연에서 하는 주디스 버틀러 강좌를 들으러 갔다. 지난 세 강좌가 너무도 만족스러웠기에 신나는 시간을 기대했다. 오늘의 주제는 [불확실한 삶: 폭력과 애도의 정치학]. 강좌를 들으며 루인의 너덜해진 상태가 묘하게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차피 취약한 인생이다. 태어났다는 것이 이미 고통으로 들어간 것이고 소멸을 향하니 취약한 삶이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 마련이다. 이 취약함이 살아가는 힘이다. 취약하니 좌절하자는 것이 아니라 취약함을 응시하며 그것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아니다, 이런 내용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읽고 있다.

그냥 계속 발제를 할까 어쩔까. 안다. 다시는 발제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이랑으로 지속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라는 걸. 발제를 할 때마다 사람이 없을 거라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에는 불안이 생길 가능성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 속에서 때로 불안이 현실이 되어 너덜해진 몸을 느끼는 것이 취약함을 직면하고 변태하는 힘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위험한 기대.

정말 불안한 것은, 이러다 어떤 모임을 떠나 두 번 다시는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내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시간 약속에 강박적으로 바뀐 것도 그 모임을 경험한 이후다. 힘들다는 얘기를 하기 싫었고 주변 사람들 중 몇 명은 그런 루인을 불안해하며 걱정했지만 맡은 일이 끝났을 때, 그곳과의 끈을 끊었다. 하지만 짧고 굵게 보다는 가늘고 길게 하는 것이 좋다. 한때 잠깐 활동하고 떠나는 것보다는 지속적으로 오랫동안 생존하며 활동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떠나고 나면 루인의 삶에서 부정하기에 복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안다.

떠나고 싶지 않기에 발제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생존하려는 행동이기 보다는 회피하려는 것은 아닐까. 불안과 취약함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닐까.

이런 취약함으로 취약함을 직면하려고 한다.
이런 불안함으로 불안과 만나려고 한다.

One thought on “취약함과 만나는 취약함

  1. 핑백: Run To 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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