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퍼레이드 참가하면 게이된다”, “퀴어퍼레이드를 보고 정체성 혼란이 생기면 어떡하냐”란 말을 이른바 혐오 세력이 하곤 한다. 한편으로 나는 이런 말에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고민한다. 그냥 대차게 비웃어주면 그만다. 저 언설의 프레임, 즉 퀴어를 부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에 말려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표현 중에, “빙어 축제에 참가하면 빙어되나요?”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냥 이 정도의 비웃음이면 충분하다고 고민한다. 중요한 것은 저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혐오 세력의 언설이 매우 정확한 진단이라고 판단한다.
인간은 언제나 오염된 존재다. 혐오 세력의 ‘우려’가 내포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을 이성애-이원젠더 규범으로만 오염시켜야 하고 다른 규범과 실천에선 격리시켜야 한다는 불안한 강박, 퀴어를 멸균해야 한다는 공포다. 다른 말로 저 ‘우려’는 인간이 주변의 영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런 노출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 인간은 관계와 사건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런 영향을 통해 지속적으로 흔들리고 혼란을 겪고 또 변한다. 정확하게 이런 지점, 저 ‘우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지점에서 다시 사유할 때,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퀴어가 되면 어떡하느냐고? 퀴어가 안 되면 그것이 더 문제다. 어떤 사건을 겪음은 그 사건을 겪기 전과 겪은 이후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즉 이성애자-비트랜스젠더가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이후 퀴어퍼레이드가 주창하는 어떤 정치학, 퀴어퍼레이드 참가자 각자가 주장하는 정치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인상을 받고 그와 관련한 고민을 한다면 그 참가자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변한 것이며, 정확하게 이런 점에서 퀴어의 포괄적 범주에 속하게 된다.
그리하여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고 퀴어가 되면 어떡하냐”는 ‘우려’에 대응하며 “빙어축제에 참가하면 빙어가 되냐”는 반응은 더 위험하고 문제가 많은 대응일 수 있다. 전자가 인간의 오염됨을 염두에 두는 인간관이라면 후자는 이를 차단하는 인간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인간의 유동성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고 동시에 이를 경계하고 싶어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인간의 유동성 자체를 전제하지 않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차게 비웃는 방식으로 저 ‘우려’에 대응할 지점은 저런 ‘우려’를 통해 유포하는 혐오와 적대지 저런 언설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관은 아니다.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서 퀴어가 되면 어떡하냐고? 그런데 그게 왜 문제지? 어떤 사건을 겪은 사람은 변할 수밖에 없다. 퍼레이드는 참가자의 인식 뿐만 아니라 ‘구경꾼’의 인식도 변하도록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퀴어’가 된다면 이것은 퍼레이드의 좋은 효과 중 하나다. 퀴어퍼레이드는 퀴어를 이해함에 있어 이성애제도를 전혀 고민하지 않으면서 손쉬운 수용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퀴어 이슈를 끊임없이 논쟁하고 떠들면서 이성애-비트랜스젠더건 LGBT/퀴어 혹은 트랜스젠더퀴어건 이들 모두가 퀴어 이슈에 연류된 존재란 점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류되어 있다. 그리하여 저 ‘우려’는 퀴어퍼레이드의 효과와 영향을 매우 잘 평가한 언설이다. 인간의 변화와 오염 가능성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면서도 퀴어 이슈에 오염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는 태도가 문제다.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서 퀴어되면 어떡하냐!!!”
“아이구, 그렇게 되면 정말 좋지요. 퀴어퍼레이드가 지향하는 바가 그것이니까요.”
*물론 현재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팀의 정치적 목적이 이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축제 퍼레이드팀이 고민하는 정치적 목적은 훨씬 복잡하고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이 글에서 ‘지향하는 바’는 제가 해석하는 측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