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2015 제15회 퀴어영화제 개막작 [두 아이 사운드 게이?]를 봤다. 게이인 감독이 자신의 말투가 게이 같은 점이 싫어서 이를 고치려고 하는 한편 게이 말투와 관련한 여러 사람의 의견, 고민, 역사를 살피는 내용이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게이 말투가 미국 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40년대 즈음부터 게이 말투를 쓰는 남성은 미국 문화에서 범죄자로 나오거나 살해당하는 인물로 나온다고 했다. 게이 말투가 악역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나아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경우 절대 다수의 악역이 게이 말투를 쓴다고 한다. 단순히 현재 시점에서 지역마다 게이 말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니라 게이 말투가 문화사에서 지역 맥락에서 개인사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살피는 작업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나는 어느 한 순간에 분노했다.
감독은 퍼레이드에 참가한 댄 새비지를 보더니 자신의 역할모델이라며 무척 좋아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동안 여러 번 댄 새비지의 의견을 보여줬다. 댄 새비지는 게이 말투와 내면화된 호모포비아, 사회의 호모포비아 등을 연결해서 발언을 했다.
그런데 섹스 칼럼니스트 댄 새비지는 바이(바이섹슈얼, 양성애)혐오 발화, 인종혐오 발화, 성차별(피해자 유발론) 발화, 뚱보혐오 발화, 트랜스혐오 발화, 무성애혐오 발화 등으로 악명 높다. 그 중에서도 바이혐오는 특히 유명하다. 댄 새비지는 여러 번, 여러 글에서 이런 혐오 발화를 하며 게이를 긍정하고 게이 인권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 지금도 칼럼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미국의 어떤 게이에겐 역할 모델이며 여전히 활동을 잘 하고 있는 저자다.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놀랍지 않다. 분노스럽지만 놀라운 일이지만 놀랍지는 않다. 바이혐오 발화는 지금도 여러 저자가 공공연히 출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런 저런 혐오 발화를 해도 미국 사회에서 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카르텔을 통해 댄 새비지는 보호 받을 것이고 안전할 것이다. 이 굳건한 권력과 연대가 댄 새비지를 보호하고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를 만든다.
누군가가 떠오르는 시간이다(www.runtoruin.com/2944). 그 역시 진보연하는 남성 카르텔을 통해 별 문제 없다는 듯 앞으로도 글을 쓰고 살아가겠지. 조만간에 전에 언급만 했던 비평을 블로깅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