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15회 퀴어영화제 상영작, 윤초연 감독, 시절인연

오늘 본 퀴어영화제 단편모음 중 일단 하나만 짧게 메모.
윤초연 감독 [시절인연]
줄거리를 요약하면, 구보는 게이(였)지만 주변의 혐오폭력 때문에 결국 구보를 사랑한 여성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결혼 전까지 사랑한 남자 애인(구보의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을 잊지 못 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사진관에 들린다. 구보는 갈등한다. 그냥 이대로 살 것인가, 이혼할 것인가? 사랑하는 딸 수아에게 묻는다, 만약 엄마 아빠가 헤어지면 누구랑 살겠냐고. 수아는 고민하다가 서럽게 운다. 구보는 수아, 아내와 함께 잘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사진작가인 옛애인을 완전히 잊지는 않는다. 자신의 책이 나왔을 때 사용한 사진은 옛애인이 찍어준 사진이다.
(아내와 옛애인의 이름 따로 있는데 제가 이름 기억을 죽어라고 못 하여 생략합니다… ㅠㅠㅠ)
게이지만 주변의 적대적 반응에 결국 이성애자연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만 옛애인을 잊지 못 하는 서사는 낯설지 않다. 강제적 이성애 결혼제도를 비판하고 게이와 레즈비언의 억압을 설명할 때 많이 등장하는 서사다. 이런 서사를 문제 삼는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결론은 이혼하고 여전히 좋아하는 옛애인과 합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어쨌거나 결혼한 사람과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일까? 결혼하고 함께 생활을 영위한 그 사람과 좋았던 순간은 전혀 없었으며 오직 부정해야 할 억압에 불과한 것일까? 즉 헤어지고 옛애인(혹은 새로운 동성애인)과 다시 합치는 방식의 결론은 어쨌거나 결혼이란 형식으로 만난 관계를 전면 부정한다. 이런 부정은 동성애 정체성 구성에 있어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결론이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바이섹슈얼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성애인과 맺은 일련의 관계를 부정하고 마치 이제까지 잘 몰랐거나, 사회적 억압에 의해 어쩔 수 없었고 나는 사실 동성애자다란 서사는 바이섹슈얼/양성애 범주를 관계의 범주/형식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이성애 아니면 동성애란 구도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결론은 좋아서 선택한 이성애인과의 결혼을 ‘결국 동성애인을 배신하고 이성애 특권을 취득하려는 자’로 치환한다. 바이섹슈얼을 비난하는 근거 중 하나다.
윤초연 감독의 [시절인연]은 이런 각본에서 벗어난다. 구보는 과거 게이였고 혹은 게이로 알려졌고 현재 자신이 ‘게이’란 점을 알고서 결혼한 여성 아내와 살고 있다. 동시에 딸과 무척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구보는 이들 모든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과 함께 살겠다고 결정한다. 동시에 최소한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있는 아내와의 관계 역시 소중하고 중요한 관계임을 받아들인다. 작가인 구보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아내의 힘이었다. 그러면서도 구보는 옛애인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옛애인이 찍어준 사진을 자신의 책에 싣고 그 책을 옛애인에게 보내준다. 어떤 사랑, 어떤 관계도 부정해야 할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긍정하려는 영화의 결론은 드문 것이고 같은 섹션에서 상영된 [프라그마]와는 전혀 다른 상상력과 결론이다. [프리그마]는 이성애인과의 관계를 다소 끔찍한 것이기에 버려야 할 것으로 묘사한다. 강제적 이성애 구조에서 동성애자의 이성애 전시가 끔찍한 경험이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애인 과의 관계가 무조건 끔찍한 것이기만 한 것일까란 질문은 남는다. 이 관계를 오직 부정할 것으로만 취급하는 태도를 질문함은 무척 중요하다. [시절인연]은 정확하게 이 질문에 어떤 식으로건 답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관계의 형식과 내용을 다시 질문하는 영화가 좋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 혹은 여성 구원자/조력자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 했다. 이것이 구보를 중심으로 영화를 구성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다. 이들 부부의 성역할이 기존의 성역할에 완전히 부합하는 모습은 아닌 듯하지만 여전히 어떤 한계는 있다. 이런 아쉬움 혹은 한계에도 나는 영화가 도출한 다른 방식의 결론이 좋다.
사실 이 글을 블로깅하는 이유는… 오늘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를 부정적으로만 평하는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복잡하여 그 자리에서 말은 못 했지만, 감독에게 영화가 참 좋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나로선 이제 이를 전할 방법이 없지만… (어떻게 검색이라도 하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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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바이섹슈얼 관련 논의는 E느님에게서 배운 것이 상당 부분 섞여 있습니다!

5 thoughts on “2015년 제15회 퀴어영화제 상영작, 윤초연 감독, 시절인연

  1. 저는 그 영화가 제시하는 이것저것 보다 여자 캐릭터들 때문에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어요… 남성예술가를 서포트하는 조력자 여자 너무너무 질리도록 싫고, 심지어 딸로 나오는 아이마저 그냥 그 영화에서 그 “기능”을 하는 것 같아요. 구보가 딸한테 엄마랑 아빠 중에 누구랑 살고 싶냐고 물어보는 대사도.. 진짜 고민없다.. 라고 생각했어요. “게이영화”라고 불리는 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여성관, 여자캐릭터에 관심없음이 갈수록 저는 너무 힘드네요…
    글구 사족이지만 그 영화 감독 너무 개싸가지고 무례해서 영화도 더 싫어졌다능 ㅋㅋㅋㅋ

    1. 정말 동의해요! 주인공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변인 특히 딸과 아내가 조력자 이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짜증나요.
      그런데 몇 가지 이유에서 이 영화를 좀 다르게 쓰고 싶었달까요? 일단 본문에 적었듯 이성애와 동성애 양자택일에서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여기는 방식에서 벗어난 측면이 있어서 그 점은 꼭 짚고 싶었어요. 흐… 그리고 질의응답 과정에서 한 질문자가 나는 성적소수자인데 너는 이성애자라서 모른다라는 언설 방식에 좀 화가 났거든요. 그래서… 흐흐
      아무려나 공개로 댓글 달아주시지…라는 아쉬움이 🙂

    2. 비밀글로 쓰는 이유는.. 저도 감독이므로 ㅋㅋ 그리고 사실.. 이번에 퀴어영화제 국내 단편들이 너무 맘에 안들었는데.. 기획단이 이런식으로 보면 속상할까봐요 ㅎㅎ 하지만 의견전달과 대화는 조만간 제대로 좀 해볼 생각이에요. 저는 이번에 시절인연과 같은 맥락으로 여성 캐릭터들이 정말.. 너무나 인간같지도 않게 나오는 국내 단편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그게 진짜 불편함을 넘어서 불쾌하기까지 했답니다… “소수자” 영화제인데 여성도 소수자라는 것은 합의가 안되어있는건가.. 또 “게이” 영화니까 여성들은 아무렇게나 그려져도 되는건가, 저예산 영화들이니까 그것까지 기대하면 안되는 것인가 등등 저는 그냥 너무 불편한게 많았어요.
      글구 시절인연의 경우, 말씀대로 저도 바이의 삶이랄지, 또 동성애를 택하는게 항상 옳은 무엇으로 그려지는 것을 깨는 것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근데 또 그렇게 봐주는게 너무 “잘”봐주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렇게 말하기엔 그 사람이 그려낸 “이성애” 또 그 이성애 안에서 여성의 모습은 너무..
      (개인적으로는) 고민이 없다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 지점들이 많아서… 쩝.. 글구 GV에서 감독이 보였던 태도나 했던 말들도 음.. 그러네요 ㅎㅎㅎ

    3. 국내단편에 대한 평가에 정말 공감해요. 저도 상당히…
      답글도 비공개로 쓰고 싶습니다… ㅠㅠㅠ
      비공개님 댓글을 읽고 나니 비공개님을 기획단이나 프로그래머로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정말 재밌고 마음 편한 작품을 잔뜩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생각 없으시겠죠? ㅠㅠㅠ

    4. 사실 이번에 영화제 영화들 보면서.. 아 너무 프로그래밍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너무 들어서요…기획단들이 다른 영화제에 대해서 리서치도 많이 했음 좋겠고… 좀 여러가지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기획단을 한다고 할까.. 근데 그러면 제가 정말 다 뜯어고치고 싶은 저의 에고와 엄청 싸우게 될것 같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고민중이에요.. 그냥 올해처럼 영화 섹션 하나를 좀 더 적극적으로 추천한다거나 (여러 영화를 추천해서 기획단이 고르게 하는게 아닌, 그냥 제가 섹션 기획 하나를 제 선택만으로 갖고 들어가는) 뭐 그런 형식도 생각해보고 있고요. 사실 뭐 제가 한다고 뭔가 대단한 뭔가가 될거라는 생각은 오만이겠지만, 그냥 너무.. 올해 영화들에 실망이 커서.. 모르겠어요.. 진짜 기획단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할지도 잘 모르겠고… 글구 영화제가 지금 어떤 식으로 영화 선정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는데 만약 “다수결”이라면… 영화 프로그래밍이 다수결로 할 일인가 뭐 그런 의문도 들고.. 마음이 복잡합니다. 이런 생각들 잊어버리기 전에 기획단에게 말하는게 여러모로 서로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겠죠?) 아 너무 고통 ㅋㅋㅋㅋㅋ 근데 루인님이 공감해주시니 힘이 나네요 ㅠㅠ 전 진짜 혼자 넘 괴로웠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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