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 그런 일을 했어”라는 말을 싫어한다. 슬프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하지 않는 것, 과거에의 향수인지 자기 과시인지 애매한 그런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슬프다.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예전에 날렸던 ○○이야”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을 특히 싫어하게 된 이유는, 한국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몇 십 년 전에 쓴 작품으로 지금도 명성을 연명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작품 활동 일, 이 십년 하고 더 이상 활동 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명성으로 살아가는 조로현상. 이런 모습이 참 싫었다. 오래하지도 않았으면서 나이 들었다는 것이 과거의 명성으로 살아가도 되는 것 마냥 행동하며 나이주의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답답하게 느꼈다.
물론 루인도 요절에 매혹했었다. 랭보 같이 일찍 죽어서 유명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만큼 박제된 삶은 안타까움이다. 일찍 죽은 대가로 삶은 박제되고 요절이 재능만큼이나 회자되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순간 타오르고 꺼지는 것 보다는 오랫동안 타올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천천히 하는 것이 진보다, 란 정희진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조금은 다른 의미일까. 하지만 겹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운동을 하다보면, 한 시절 열심히 활동을 하다 자신만의 이력이 생기고 노하우가 생겼을 즈음엔 지쳐서 떠나는 상황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새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남아있는 사람에게도-모두에게 슬픈/아픈 일이다. 매체(문집) 같은 것도 그렇다. 언제 누가 활동했는지도 모르거나, 이른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전설”같은 활동의 한 두 기록만 너덜한 표지로 남아있는 것을 접하면, 안타깝다. 좀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오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살다보면 중간 중간에 여러 가지 상황으로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천천히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이 이랑 세미나에서 빠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신돈]에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에게, 월선스님(큰 스님)이 신돈에게 말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