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채식한다는 말을 쓰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고민한 이유 중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며칠 전 어느 행사에 갔다. 그곳에서 참가자 모두에게 샌드위치를 나눠줬는데 햄과 치즈가 들어간 종류였다. 일행으로 온 것으로 추정하는 ㄱ이 ㄴ에게 “채식하는데 그거 먹어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ㄴ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ㄱ은 계속해서 “햄 들어가서 못 드시잖아요”라고 말했고 ㄴ은 괜찮다고 했지만 ㄱ은 계속해서 물었고 ‘염려’했다. 그 대화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래, 내가 이래서 채식한다는 말을 안 하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떠드는 그 언설, 분명 나를 엄청 신경써주는 걱정이고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곤혹스러워지는 상황, 기본적으로 채식을 하지만 때로 상황에 따라선 그렇지 않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런 선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가 나의 고민 거리였다.
이 고민은 정확하게 젠더를 둘러싼 고민과 연결된다. 지금은 내가 나를 트랜스젠더퀴어라고 설명하지만 내일은 그냥 여자라고 말할 수도 있고 다음달엔 그냥 남자로 살래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4월 즈음엔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고 수술을 받겠다며 돈을 모을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젠더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인식론적 변화를 요청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건에도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비건이지만 상황에 따라 비건이 아닌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내가 내킨다면 그럴 수도 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가 아니라 내가 내킨다면 말이다. 언제가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글을 썼듯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삶은 주변 반응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너는 비건이니까 이런 건 먹으면 안 돼,라거나 너는 아무거나 먹는 비건이니까 그냥 대충 먹으라며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상황 같은 것. 이런 것이 곤란스럽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규정하거나 확정하려는 방식말이다.
그런데 이런 오지랖이나 염려에 비하면 한국의 퀴어 관련 행사나 페미니즘 관련 행사에 과일을 제외하고 비건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거나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은 늘 놀랍고 고민거리다. 도데체 왜?
아무려나 나는 내멋대로 할거고 여전히 나는 비건이고 여전히 나는 채식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