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을 즐긴 후, 정희진 선생님의 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산 [씨네21] 542호를 뒤적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관련 기사(안시환, 보편적인 인간들의 좌절에 대한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가 있어 조금은 망설이면서도 읽었다. 후반부 즈음을 읽다가 당황했다.
에니스가 잭에게, 자신의 어릴 적 얘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아마 잭이 에니스에게 같이 목장을 경영하자고 말하는 장면에서라고 몸에 남아있다. 에니스는 어릴 적, 자신이 살던 곳에 ‘남자’ 둘이서 목장을 경영하던 곳이 있다고 했다. 누구도 진실은 몰랐지만 둘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진실은 누구도 몰랐지만 소문은 있었다. 어느 날, 에니스의 아버지는 에니스와 에니스의 형을 데리고 목장 경영자 중 한 명이, 성기가 뽑힌 채로 죽어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아버지의 짓이고.
한겨레 기사는 이 장면을, ‘동성애’자로 소문이 난 사람을 죽인 건 에니스지만 아버지의 짓이라고 잭에게도 거짓말을 했다고 적었다. 바로 이 지점이 당혹스러웠다. 단순히 당시의 에니스의 나이가 10살도 안 된, 그래서 그렇게 살인을 하기엔 너무 어렸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루인은 에니스가 그 기억을 고통스럽게 상기하는 건, 그 기억이 자신의 동성애 욕망에 대한 강력한 금기로 각인되었기 때문으로 느꼈다. 즉, 에니스의 아버지가 두 형제를 데리고 간 건, 그 전부터 에니스가 이반queer임을 알았기에 그랬다고 느꼈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 행위는 에니스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고 그래서 이후 에니스는 자신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산 것이다. 잭과 함께 살기를 바라지만 그러기엔 자기 안에 있는 강력한 금기가 너무 큰 것이다.
이 장면 때문에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루인의 기억이 정확한지 기자의 기억이 정확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상관은 없다. 에니스가 죽였다면, 그건 더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에니스의 살인은 바로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 그 사람에게 투사한 결과니까. 과도한 혐오는 사랑하지만 바로 그 감정이 두려워 생긴 감정이니까. (이반/트랜스 혐오가 심할수록 그 만큼 갈망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때 에니스의 아버지의 행동은 에니스의 행위에 대한 무언의 질책인지도 모른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네 눈으로 봐라.”)
이렇듯, 금기를 가진 에니스와는 달리 잭은 영화 시작부터 너무 티가 났다. 그래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특히,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하는 방목 일을 맡기 위해 사무실에 온 잭이 차에서 내려, 에니스를 보곤, 차에 기대어 에니스를 유혹하려는 행동은 유치찬란하고 귀엽다고나 할까. 크크크. 그 모습을 ‘이성애’ 연애에서 상대를 유혹하는 모습처럼 느끼는 루인 때문에, 또 한 번 (비)웃었다. 이런 느낌은 마치 ‘동성애’/비’이성애’/이반/트랜스들의 연애는 뭔가 다른 코드가 있을 거란, 이른바 “동성애 코드”, “퀴어 코드”란 것이 있을 거란 환상에서 비롯한다. 이런 환상은 타자화와 대상화를 동반하는 폭력이며, 별나라의 외계인 취급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메종 드 히미코]를 즐기며 “너(사오리)가 아니라 ○○(페인트 회사 사장인데 이름을 잊어서;;;)가 부러워”란 말을 듣고 엉엉, 울었던 이유와 동일하다.)
(사실, 에니스도 그렇지만 잭 역시 처음부터 자신이 게이임을 알고 있다고 느꼈다. 영화의 시작부터 이런 모습이 너무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의 ‘이성애’결혼은 에니스의 ‘이성애’결혼과 더 이상 에니스를 만날 수 없음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한 행동으로 다가왔다.)
잭과 에니스가 태어날 때부터 이반이다 아니다, 의 논쟁은 상당히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이런 논쟁은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지만 루인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 ‘양성애’, ‘이성애’와 같은 성애들은 이분법으로 나뉘는 젠더 관계 속에서 의미가 발생하는데 타고난다거나 이다/아니다, 란 논쟁은 별로 유의미 하지 않다. 정체성이란 것이 확고하고 고정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쟁으론 자신을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면서도 ‘이성’과만 연애를 하는 사람의 경험을 설명하지 못하며 대 여섯 살부터 이반으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성애’결혼을 하고 손녀/손자까지 있는 육, 칠십대의 “노인”이 이반임을 깨닫고 비’이성애’ 동거 관계에 들어가는 걸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자체를 배제하는 경향도 있다.)
잭과 에니스는 처음부터 이반이었는데 둘의 만남을 계기로 그것을 각성했다거나, 처음엔 이성애자였는데 둘의 만남과 첫 관계를 가진 후에야 깨달았다거나 하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둘 다, 서로를 만나기 전부터 이반이란 느낌이 강하지만.) 이반/트랜스가 ‘이성애’-젠더 강제적인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제제기가 이반/트랜스는 ‘이성애’자와는 달라, (‘이성애’-젠더 억압으로 인한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가 아니라)뭔가 독특한 코드가 있어, 라는 식의 언설이나 이런 식의 기대 모두 타자화하는 시선의 문제가 있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이다.
※뭔가 결론이 이상하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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