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은, 이런 언설 모두에 반대 한다. 이런 언설 모두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는 사람과 같은 인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차이에 의한 차별을 반대 한다”와 같은 말들 모두, “차이”나 “다름” 자체를 질문하지 않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하거나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인식을 하고 있다. “차이”와 “틀림”이 있다는 전제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차이”와 “다름”을 어떻게 발명하는지, 그것이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지속하고 재생산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왜 하필 피부색이 머리카락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지, 외부성기에 의한 젠더가 왜 이렇게 의미를 가지는지, 왜 안경을 쓴 사람은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는지, 등등 왜 하필 그런 “차이”를 발명했는지, 이런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는지 등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기존의 “차이”를 당연시 한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그래서 때로 이런 언설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착각에 빠지기 위한 언설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하다(물론, 이런 의심은 “누가” 이런 말을 하느냐에 따라 맥락으로 이해할 문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은 언어도 아니지만, 특권화한 언설이라는 점에서 조롱거리일 뿐이다.)
물론 “차이에 의한 차별에 반대 한다”는 말의 효용을 모르는 건 아니다. “장애인”차별, 이반queer차별, 트랜스차별 등, 무수한 차별이 횡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언설과 이런 언설을 통한 정책 변화가 분명 일정 정도의 효과를 가지지만, 기존의 사회제도가 바라는 전제를 그대로 안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고 몸앓는다.
“차이” 자체를 질문하지 “차이”를 전제한 “차별에 반대”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런 언설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설은 애시 당초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모두를 침묵케 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