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적 감각에서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은 상당히 무서운 말 중 하나다. 비록 이 말에 조롱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할 때가 더 많다고 해도, 그 말에는 위험과 두려움을 내재한다. 그 이유는 실제 능력이 없거나 잘못된 판단을 할 때에도, 대통령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통해 필요한 모든 토론과 논의, 복잡한 쟁점에 대한 더 많은 연구의 필요성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경험 본질론은 한국의 오래된 속담 ‘백문이 불여일견’처럼 시각에 기반해서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심각한 오만과 오해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경험은 곧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정치적 투쟁의 장이 된다.
이것은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역사학자들이 오랜 세월 논쟁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경험하면 곧 알 수 있다는 말은 중요한 쟁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첫째, 가부장제 사회에서 특권적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 피해와 같은 일은 인지 불가능한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그렇기에 가부장제의 폭력적 작동 양상은 경험한 적 없는 일,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사건으로 취급되었고, 이는 억압과 피해를 계속해서 투쟁하며 입증해야 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 이럴 때, 경험은 자연스러운 것, 자명하게 모두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어떤 위치,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가 경험 인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다시 확인된다.
둘째, 경험한 피해나 억압이 그 자체로 자명하게 알 수 있는 사건인가를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여성학 강의나 강좌를 처음 듣고 나면, 그동안 자신이 겪은 그 많은 사건이 성폭력이나 성차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한다. 퀴어와 관련한 인터뷰 문헌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에서는 억압과 피해가 당연한 것으로 인지했다가, 유학이나 어학연수 등을 이유로 외국 생활을 하면서 억압과 피해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다시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서사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억압과 피해의 경험 역시 자명하기보다 해석과 지식의 영역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페미니즘 정치가 경험을 자명한 것으로, 경험했으면 알 수 있는 것으로 논했던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경우 페미니즘은 경험을 자명한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기존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을 마련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작업을 한다. 이것은 경험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경험의 의미, 경험을 인지하는 방식을 본질화하지 않는 것이며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언어를 모색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셋째, 경험이 본질화되면 유사한 범주의 속한 사람은 같은 사건에 대해 동일한 해석을 한다고 가정된다. 이것은 성희롱 피해와 같은 폭력의 피해에 모든 여성은 동일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며, 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느낄 것이며, 모든 퀴어는 동일한 정체성이면 그 경험과 생애사도 동일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미 익숙하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비규범적 질서를 규제하고 통제, 관리하기 위한 지배 규범적 상상력이다. 폭력이나 차별에 대한 감각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그 차별과 폭력을 덜 심각한 것으로 수용한다고 해서, 폭력이나 차별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논의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경험이 본질화되면 이성애규범성을 뒤트는 퀴어의 등장은 불가능하고 가부장제 질서를 문제 삼는 페미니스트의 등장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경험 본질론에서 이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우발적인 오류다. 교육 제도에서, 가족 제도에서 누구도 퀴어한 실천을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퀴어로 고민하고, 페미니스트로 고민할 수 있겠는가? 반-퀴어 혐오 세력이 퀴어를 오류로 주장하는 이유도 인간의 경험을 동질화, 본질화하는 경향과 연관된다. 경험은 본질적이기보다 엄청나게 많은 편차와 우발성이 중첩되고 여기서 해석과 새로운 인식론이 다시 겹쳐지면서 변주와 변형이 발생하며 그렇기에 언제나 해석과 재해석의 장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구 방법 중 인터뷰 연구를 진행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이 고민에 위치한다. 경험에 대한 해석은 동일하지 않고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할 새로운 언어는 갱신되어야 하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인터뷰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에 대한 이런 (매우 축약된) 논의는 경험을 말할 때 언제나 가장 첨예한 논쟁의 장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더 정확하게, 당사자주의를 알게 모르게 지지하는 발언이나 행동은 언제나 경험을 본질화하는 위험을 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가 유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가정은 내부 구성원을 동질화하고, 동질화나는 내적 다양성을 논의할 수 없게 만들고, 이것은 규범성을 생산하는 위험한 촉매가 된다. 그렇기에 한 공간에, 친밀한 공동체에 있는 이들이 경험을 공유할 것이라는 믿음은, 때때로 안전함과 편안함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가장 폭력적인 장이 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누군가가 자신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질문을 하는 순간이 매우 고맙고, 또 반성한다. 그 질문은 나 역시 익숙한 그리하여 동질적인 폭력적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대화 요청이기 때문이다.
경험과 관련한 여기까지의 논의는 사실 여기저기서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기분이고, 변주되지만 대체로 유사한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경험과 관련한 논의를 반복하는 이유는, 경험을 본질화하며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너무도 많은 곳에서, 너무도 빈번하게 마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수능과 관련한 최근 논의와 연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고민이 많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이와 관련해서 발언을 하는데, 나까지 여기에 말을 보태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이 주제에 말을 보태기로 한 이유는 경험과 관련한 질문 없음이 모든 논의를 망치고, 단순히 논의를 망치는 문제를 넘어 그 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이들을 가장 빨리 배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에서 모든 성인은 아동 청소년 시기를 겪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겪었기에 그 시기와 관련해서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발언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교육 문제가 겹치고, 수능이나 대학 입시와 관련한 주제가 겹치는 그 논쟁은 더욱 뜨겁고 복잡하고 지저분해진다. 많은 성인이 대학 입시 공부를 했고, 방송에 출연하는 상당수의 패널이 대학에 입학했거나, 졸업한 이들이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더욱더 가볍게 말을 얻는다. 하지만 그래서 또 안다. 요즘의 십대는 어떤 모습인지 성인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또 안다. 그래도 십대 시절을 경험했으니 그 시절과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 요즘 십대가 어떤 지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십대 시절을 겪었으니 그 시기와 관련해서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마찬가지로 요즘 입시 제도가 어떤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교육 과정을 거쳐서 입시를 경험했기에 입시와 관련해서는 말을 보탤 수 있다는 믿음. 이 모든 믿음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 수준은 아니라고 해도 겪었으니 알 수 있다는 오만함 혹은 위험성을 내재한다.
오만함 혹은 위험성은 단순히 경험했으니 알고, 경험했으니 그 주제에 대해 떠들 수 있다는 믿음에 제한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논의 전개는 아동 청소년의 삶을 입시와 연결짓고, 이 연결은 입시를 준비하고 정규 학교 과정에 참여하는 청소년을 보편으로 삼는다. 더 정확하게, 이 논의에서 학교밖 청소년이나 대학 진학을 고려하지 않는 청소년은 아예 청소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이와 관련한 논의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입시 중심의 학교 제도가 청소년의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킬러문항으로 촉발된 모든 논쟁은 단순히 수능의 문제가 어려우냐, 쉬우냐의 문제, 모든 학생을 등급제로 나눠서 위계를 만드는 문제 뿐만 아니라 누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느냐의 문제, 모든 청소년은 학교에서 입시를 준비하는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반드시 같이 질문토록 한다. 이것이 누락되는 현재의 많은 논의나 발언은 한편으로 의제에 집중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락과 배제를 아예 사유하지 않는 문제의식이 된다.
이런 질문을 경험 논의와 연결지으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단순히 반지성주의나 오만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경험 자체가 배제와 추방, 누락의 실천 속에서 구축되는 상상력일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경험은 내 삶의 일부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논쟁되지 않으면, 배제의 본질주의, 추방의 규범 생성을 전제한다. 이것의 가장 익숙한 판본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배제하며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만들고자 했던 일군의 주장이다. 그러니 경험은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경험을 말할 때 그 경험이 전제하는 규범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부하지만, 익숙하지만, 꼭 기억할 필요가 있는 쟁점이라고 믿는다. (50H50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