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1픽셀의 어긋남

이 영화는 카메라 구도가 흥미로운데 그 이유는 마치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상하좌우의 균형을 완벽하게 맞추려고 애쓰는 것마냥 화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딱 1픽셀이 어긋난 화면을 만든다(1픽셀이란 표현은 같이 본 사무실 동료가 말한 것).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하고 불편하다. 이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이며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 자체는 초반에 나온다. 강에서 수영하는 장면의 화창한 맑음 혹은 밝음. 그리고 밤에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까지만 인지할 수 있는 시선의 한계. 이것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관심/흥미의 영역. 딱 그만큼이 세상에서 인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선은 모든 것을 아우르지 않으며 내가 본 것과 현장에서 발생한 것 사이에는 간극이 크다. CCTV가 필요한 이유도 이것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CCTV와도 같은 카메라 구도를 가진다.

영화를 접하기 전, 나는 포스터를 오해했다. 주인공의 집은 밝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어둡겠거니… 의도적으로 화면에서 어둡게 나오겠거니… 아니다. 매우 선명하게 나온다. 그리하여 그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인지가 없다면 그냥 지붕이기도 하고 주인공의 공간 외부이기도 하다. 포스터는 어떤 의미에서 주인공이 인지하는 세계를 포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 인지 영역, 관심/흥미의 영역은 소리를 통해 경계가 모호해진다. 수용소의 비명은 계속 들리고 눈부시게 맑은 하늘 아래 꽃은 만발하며 아침 식사는 중요하고 수용소 굴뚝에서는 연기가 끊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이상한 사람도, 특별히 무감한 존재도 아니다. 그저 1픽셀 어긋나 있을 뿐이다. 누가 인간인가? 누구의 고통이 고통으로 인지되는가? 지나치게 반성적인 감상일 수도 있지만, 주인공 가족이 또한 나의 모습 같이 괴로웠다. 나 역시 나의 흥미 영역, 관심 영역에만 간신히 관심을 쏟을 뿐, 나의 인지에서 벗어난 존재와 현장이 많다. 주인공 가족은 분명 문제적이지만, 그들만 문제적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진짜 문제가 된다. 인식의 영역, 빛이 전달하는 세계의 모습을 주인공 가족의 문제로만 제한한다면 나 역시 정원에서 장미와 달리아와 라일락이 예쁘다고 말하는 또 다른 주인공 가족이 될 뿐이다.

폭력적 현장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있어 정말 많은 질문을 던진다. 끊임없이 들려주지만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그 현장은 잔상으로 남는다. 그 잔상이 엇나간 1픽셀에 위치한다. 그리하여 그 1픽셀은 화면 전체가 된다.

시간이 된다면 두어 번 더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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