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지식을 공부한다는 것은 고정된 대립항을 맥락 없이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유통과 소비를 통해 변형되기 마련이라 그에 대한 섬세한 접근 없이, 누가누가 뭐라고 했는데 너는 이걸 잘못 사용했다거나, 이런 중요한 가치가 있고 문제적 체제가 있는데 문제적 체제를 일방으로 비판하며 중요한 가치를 찬양하는 순간, 그 중요한 가치는 교리가 되지 질문이 되지 못한다.
추상적 표현을 한 이유는, 언제가 자긍심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재의미화되는 방식을 탐구해보고싶어서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이는 프라이드와 동일하고, 러시아의 퀴어가 사용하는 프라이드와도 동일한 개념일까? 개념어 혹은 용어는 지역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언어로 재의미화되는데 이에 대한 촘촘한 이해가 누락되면 개념에 대한 비판은 공허해진다. 더 정확하게는 비판의 논점이 모호해지면서 비판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잃고, 비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소중한 지점이 뻔한 소리로 변형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자긍심 혹은 프라이드라는 용어는 죽음과 애도의 정치와 깊이 연관되고, 그래서 타인과 연결되는 감각을 내재한다. 장애여성공감은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소중한 정치학을 제시했는데 불화가 곧 제도화나 자본의 활용을 배제하는 태도는 아니다. 이들과 싸우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정치가 불화인데 이것은 언제나 양가적이고 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집단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트랜스젠더퀴어가 호르몬 투여 등 의료적 조치를 취하고 더 안전한 병원을 만들고자 로비를 하는 일이 곧 의료규범에 동조하거나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 규범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동시에 의료 시스템 내에서 필요한 장치를 활용하는 것은 모순도 아니고 딜레마도 아니지만 너무 많은 경우에는 모순과 딜레마로 경험된다. 한국에서 쓰이는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라는 용어 역시 이런 모순과 딜레마를 동시에 포착한다. 애도의 정치와 분노, 저항, 시위하는 태도를 포함하면서도 때때로 가장 규범적인 의미의 안전과 질서를 지켜나가기도 한다. 이 층위를 읽는 것은 한편으로 애정을 필요로 하고(나는 공부노동자와 활동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비판하거나 연구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순과 딜레마를 견디는 힘이다. 여기에 실패할 때 비판의 내용이 아무리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일 때에도 공허해지고, 비판의 맥이 힘을 잃게 된다. 내가 퀴퍼에서 트랜스 자긍심 깃발을 들 때 그것은 ‘내가 이 바닥 제일 잘난 트랜스다!’라는 의미일까, 아님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손짓하는 것이자 죽음을 목격하고 오늘도 고단하고 힘들었던 하루를 살아낸 다른 트랜스에게 보내는, 생존하자는 신호일까? 자긍심이나 프라이드를 둘러싼 논의는 이 복잡한 시대적, 지역적 의미를 읽는 작업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언젠가 자긍심/프라이드가 지역에 따라 달리 의미화되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보고 싶다. 찬반의 양자택일, 적대의 피아구분으로는 계속해서 누락되는 맥락을 읽는 방법은 모순과 딜레마의 정치에서 읽기 작업을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