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성과 동화주의의 공존 속에서

몇 달 전,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지인이 내게 해 준 인사, “좋은 자리에서 만나니 좋네요”는 화두처럼 남아 있다. 처음에는 기쁘고 또 슬픈 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또 다른 추모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도 열심히 활동했던 한 트랜스젠더퀴어 활동가의 추모식은 슬펐고, 생전에 인사를 나누지 못한 나의 무지와 게으름이 부끄러웠고 그의 치열한 노력이 진하게 느껴지는 자리기도 했다. 다양한 의제를 고민하는 이들이 추모 발언을 했고, 절친의 발언은 고통스럽게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괴로운 것은, 좋은 자리에서 만났던 이들을 또한 추모식에서 그대로 만났다.

몇 년 전, 나는 이틀 연속, 다른 장례식장에 참가했고 대부분의 조문객이 겹치는 상황이 꽤나 힘들었다. 달리 말해 나 만이 아니라 많은 퀴어가 다른 장례식장에 참가했고 같은 조문객을 만나 인사를 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올해 축하와 추모식에서도 상당히 겹치는 사람들을 만났다.

오랫 동안 나는 동성결혼에 비판적이었고 지금도 동성혼이 허용되기보다 결혼제도가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권리를 개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동성결혼을 무용하거나 동화주의적이거나 규범성 그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깨닫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사안을 급진성과 동화주의 같은 방식으로, 규범성과 반규범성의 이분법이나 양자택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한 축에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 모든 행사에 참가하는 이들이 거의 겹친다는 점이다. 동성결혼에 축하하기 위해 참가하는 이들은 또한 추모식에 참가하는 이들이며,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이들이며, 정부나 제도의 폭력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자리에 참가하는 이들이며, 더 나은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서로 싸우면서도 또한 토론하는 자리에 마주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의제에 따라 나뉘어 서로 함께 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또한 그 모든 자리에 함께 하며 같이 투쟁하고 서로 논쟁하고 싸우고, 또 같이 투쟁하고 있다. 낭만적이거나 멋있다는 것이 아니라, 적은 사람이 더 많은 힘을 만들기 위한 부득이한 상황이지만 부득이함은 때로 익숙한 이분법을 초과한다. 누군가를 내켜하지 않을 때에도 축하와 추모에, 제도화와 투쟁에 함께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이 모든 것이 모순이 아니라 모순과 갈등의 지형으로 이해하는 그 태도가 문제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 모든 자리에 있는 이들이 겹치고 평소에는 거의 못 만나지만 그 모든 자리에서 안부를 전하는 지형은 그리하여 모순이나 대립하는 지형이라는 토대는 사유의 출발이 아니라 사유의 불가능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말한다. … 뭐, 요즘 이런 고민을 하며 살고 있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까지 삶을 영위하고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