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리와 방관

기사 둘:
‘초강경 진압’ 평택 강제퇴거 사실상 완료
용역원들 “육군 소령이 몸싸움 유도 지시”

여러 달 전부터 계속해서 접하는 소식에 화가 나면서도 그렇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군대와 경찰력으로 진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루인의 최대 관심분야이자 유일한 관심분야는 루인이다. 루인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최대 관심이자 유일한 관심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만 잘 먹고 살면 그만이다”란 의미가 아니라 지금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나”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지점에서 출발하는 고민이 풍성한 이야기/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나쁜 일이니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마치 남의 얘기인 양 “동정심”으로 말 할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말해주지 않지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루인이 기지촌 성매매에 접근하는 방식은, 한국의 군사주의(문화), 루인의 “아빠”라는 사람이 경험한 베트남 전쟁 참전과 그 당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했던 행동들, 젠더 권력관계, 섹슈얼리티, 섹슈얼리티 통제 등등과 연결해서 접근한다. 이 지점들은 마치 남의 얘기지만 어쨌든 폭력이라서 문제제기 하는 것과는 다른 얘기를 할 수 있고 “남의 얘기”라면서 수수방관할 수 없게 하는 지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추리 사태를 접하며, 루인이 할지도 모를 어떤 운동을, 언제든지 공권력이 진압할 수 있겠구나 하는 몸앓이가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공권력으로 진압하는 방식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는 모든 것은 불법”으로 간주하는 가장 폭력적인 방식이다. 그러면서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읽은 [그 밤의 진실]이 떠오른다. 영화에선,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에드나를 총으로 죽여서 ‘평화’를 얻는다. 사실 그건 ‘평화’가 아니라 모두가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아픔을 발화할 수 없는 억압이다. (첫 번째 기사에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던 대추리 일대는 진압작전이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다. 무서운 말이다. “평온”이라니.)

사실, 이런 방식은 단순히 정부 권력 기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행사가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접할 수 있는 “해결”방식이다. 권력 차이가 조금이라도 발생하는 관계에선, “대드는” 말은 할 수 없게 하고, “불평/불만”사항은 조금도 말 할 수 없게 하는 것.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교사가 잘못했음에도 교사의 권력에 의해 그 지점을 지적할 수 없고, 말하면 “건방지다”고 오히려 “체벌”을 가하는 것. 이것과 대추리에서 군부대와 경찰력, 용역업체를 동원해서 “해결”하려는 건, 단 하나의 목소리만 인정하겠다는, 그런데 그 목소리는 권력을 가지고 아무런 불편함도 없는 “나”‘의 경험에 기반한 목소리/언어이며 그렇지 않은 목소리/언어는 폭력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렇게 소통 없이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정치적 성향이 “친미”든 “반미”든, 군부대가 들어오는 걸 찬성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연대해서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래야만 당신이 원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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