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 행사에서는 가끔 말한 적이 있는데, 2000년대부터 트랜스젠더퀴어 운동에 참여하고 글을 쓰고 언어를 만들려고 애써왔던 한 명으로써, 2015년 이후 트랜스 혐오가 대중화되었던 시기에 충분히 제대로 개입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늘 강하게 남아 있다. 아무렇지 않을 때도 많지만 불현듯 그 죄책감이 밀려와서 다급해질 때가 있다.
2015년을 지칭하는 다양한 언어가 있어 누군가는 페미니즘 리부트로 부르고, 누군가는 페미니즘 대중화라고 부르고, 이 모든 명명이 가능하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 이후 시기를 트랜스젠더퀴어 혐오의 대중화(혹은 트랜스 혐오의 대중화)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뭔가 제대로 정리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나의 체감은 그러한데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슬프게도 트랜스 혐오가 논쟁거리로 등장했다. 트랜스젠더퀴어 혐오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여전히 특정 퀴어 범주와 관련한 혐오가 등장하지만 그 중 트랜스젠더퀴어 혐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생성된다. 누군가는 태만한 방식으로 트랜스 혐오를 재생산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 말에 항의하고 반박하기 위해 어마하게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그 글은 혐오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이것이 유난히 내게 두드러진다는 감각은 그 전 시기까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젠더퀴어 혐오를 논하면 많은 사람이 이것을 서구의 옛날 사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2015년 이후 이 논의는 지금 현재 한국의 논의가 되었고 지형은 훨씬 복잡해졌다. 아차하는 순간 이분법의 단순한 지형에서 적대만 생산하는데 동조하게 된다. 그래서 트랜스 혐오의 대중화라고 부르는 것은 혐오를 생산하는 특정 누군가를 분명하게 지칭하지 않으려는 고민이기도 하고, 트랜스 혐오가 대중화되는 상황에 동조하는 많은 행위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책임을 면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책임을 질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두려운데, 내란과 대형 참사로 분노와 애도의 시기에 트랜스 혐오가 또 다시 힘을 받고 있을 때, 동료들이 연달아 세상을 떠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염려 때문이다. 동료를, 지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은 무뎌지지 않고 오히려 타격감이 쌓여가기만 한다. 아무리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더라도 그 타격감은 누적된다. 그래서 슬픔은 오래가는 연대의 힘이 된다. 오래 침전한 상태로 지냈지만 그럼에도 올해는 좀 뭔가를 해야겠다. 두려움이 시위를 하는 힘이듯, 그 힘으로 뭔가를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