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운이 좋게도 이번 학기에도 퀴어이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학기에는 섹슈얼리티이론을 했으니 꽤나 운이 좋은데, 어쩌면 이런 종류의 수업은 올해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어(임시직이니 해마다 올해 혹은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음) 남겨보는 기록.
퀴어이론이나 섹슈얼리티 이론의 강의 계획서를 짜는 일은 좀 까다로운데, 워낙 방대한 내용을 다루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섹슈얼리티 이론은 강사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조금도 겹치지 않는 내용과 인식론으로 강의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다. 재생산권으로 한 학기 강의 내용을 작성할 수 있고, 이성애규범성으로, 성노동/성매매로, 성폭력으로 한 학기 강의 내용을 작성할 수 있다. 그리고 해당 학과에 관련 과목이 하나 뿐이라면 이 모든 것을 적당히 섞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러다보면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당연한 일이다).
고려할 게 많다고 했지만 강의계획서를 만드는 일은 꽤나 단순하다. 일단 직전 학기 수강생의 새로운 이해를 고려하고 최근 출판된 논문, 최신 특집호 주제, 그리고 나의 관심사를 포함한 새로운 논문을 찾는 작업을 한다. 이번 학기의 경우 7-8월 동안 학술지 논문 150편 정도를 검토했는데, 물론 이 모든 논문을 꼼꼼하게 다 읽었다는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개괄적으로 살피는 정도였다. 그러고 나면 30~40편 정도를 걸러내는데 이제부터 이 논문을 최대한 열심히 읽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게 때려붓는 작업에 가깝기 때문에 자주 아득해지고, 이 작업을 다 진행하고 나면 열심히 공부했다는 기분보다는 뭔가를 읽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뭘 읽었는지 모르는 어사무사한 상태가 된다. ㅋㅋㅋ
이 정도 논문을 검토하면 매우 좋은 논문, 수업에서 다루기 좋은 논문, 애매한 논문 등이 걸러진다. 매우 좋은 논문과 수업에서 다루기 좋은 논문은 다른데, 해당 주제를 수업에서 다루려면 사전 지식이나 이해가 상당히 필요하고 이러면 16주(현실적으로 12주)에 불과한 한 학기에 다루는 것이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나는 몇 년 전부터 수업 시간을 통해 ‘동의’ 개념을 퀴어링하는 논문을 계속 다루고 있고 조만간에 이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논의를 정리하며 새로운 질문으로 나가는 논의를 하는 논문은 나에게는 매우 좋은 논문이지만, 수강생에 따라 이 주제를 처음 접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보니 처음 접해도 읽을 수 있으면서, 어느 정도 고민을 한 수강생도 새로운 질문이나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논문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한데… 사실 이런 논문은 거의 없다. ㅋㅋㅋ 그래서 결국 어느 지점에서 타협하기 마련이라, 타협하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다.
또한 올해 나의 주요 관심은 ‘지식의 지방화’, 혹은 ‘지역적으로 사유하기’인데 이는 퀴어 지식, 퀴어 개념을 지역적으로 재이론화하는 작업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또한 한국 퀴어 운동에서도 이스라엘의 무차별적 학살과 전쟁으로 인한 주제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기에 새롭게 추가한 주제는 극우-퀴어, 혹은 퀴어의 규범적 폭력성을 다루는 것이었다. 나는 극우-파시즘이 퀴어를 어떻게 추방하는가라는 주제도 중요하게 인식하지만, 퀴어가 극우-파시즘과 어떻게 공모하는가에 관심이 더 많다보니, 2019년부터 퀴어 이론 수업을 하면서도 다루지 않았던 퀴어-극우, 퀴어-전쟁과 관련한 주제를 추가하는 것은 중요했다. 그렇기에 지역적으로 사유하는 최근 논의를 중심으로 선별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극우-퀴어나 팔레스타인 퀴어와 관련한 논의를 선별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 외에도 몇 가지 주제가 더 있는데 수업에 반영하지 않았으니 굳이 기록할 필요는 없을 거 같고.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한 학기는 고작 16주에 불과하다. 첫날,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12주에 불과하고 글쓰기 수업이 한 주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럼 텍스트를 읽고 논의를 하는 수업은 11주에 불과해진다. (진짜 한 학기 20주로 합시다… 죄송) 그리고 퀴어이론 같은 수업은 학부시절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수강생, 퀴어 단체에서 활동을 한 수강생도 있지만 퀴어 이론을 처음 배우는 수강생도 같이 있다. 그렇다면 서로 이해의 정도가 다를 때에도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기본 도서(입문서)가 포함되어야 하고, 장애나 질병과 퀴어 등 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주제도 있다. 기본 입문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으로 관심이 많은 주제 등을 배치하고 나면 남는 주차는 2~3 주차가 된다. 아울러 최근 출판된 퀴어 관련 도서도 수업에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150편 정도로 시작한 논문 선별 과정은 10편 정도 남기면 성공일 때가 많다. 새롭게 출판된 퀴어 관련 도서가 많으면 논문을 대거 줄여야 하고, 그러다보면 5편 정도만 남을 때도 있으니까.
암튼 이런 과정을 거쳐 한 학기 강의계획서가 완성되는데(그 과정에서 7~8가지 다른 판본이 생기기도 한다)… 가장 슬픈 점은, 오래 고민했지만 결국 이 주제는 빼야겠다고 결정해서 강의계획서에 포함시키지 않는 주제가 있는데 그러면 반드시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수강생이 있다는 것. 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