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지 논문, 느리고 느린 속도감

01

오랜 만에 학술지 논문을 출간했다. 학술지 논문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은, 이제는 모든 성과도 인용도 등재지 논문이 기준이라는 현실 때문이었다. 등재지 논문이 없으면 성과 없는 한 해가 되고(그래서 근래 몇 년간 나는 아무런 성과가 없는=빈둥빈둥 논 인간이고), 등재지에 쓴 글이 아니면 이제는 없는 글, 인용할 필요가 없는 글로 여기는 경향을 확인했다. 그럼 나도 학술지 논문으로 글을 써야지. 어차피 공부노동자의 성실성은 학술지 논문에 글을 쓰는 것이라는 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고, 그냥 내가 안일하고 게을렀던 문제다.

논문의 첫 번째 각주로 본 논문의 초기 아이디어는…어쩌고 하는 글을 쓰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지웠다. 지난 10년 가까이 여기저기서 떠들거나 짧게 언급한 내용이다보니 초기 아이디어 어쩌고 하는 글을 쓰는 것이 불가능하더라. 많은 선생님은 논문을 내면 그제야 논문 관련 내용을 떠드는데 나는 10년을 떠들어야 비로소 논문으로 구성할 수 있는 인간이라 떠든 곳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오리지널티는 분명하게 존재하는데, 그 동안 떠든 이야기라고 해봐야 산발적인 아이디어였다. 또 분석 대상이 같은 것이지 분석 방향과 다른 텍스트와 중첩 시키는 방식 자체도 달라졌다. 그리하여 다른 어디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고 논증하지 못 했던, 이번 논문에서만 입증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아이디어…’ 어쩌고는 표시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논문 쓰기 전에 안 떠들어야지…)

학술지 논문 출간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내년 초에는 이번 논문의 짝패와도 같은 젠더개념사 논문을 작업할 예정이다. 신나는 주제인데 그래서 더 어렵다. 그 사이에 두어 편 더 투고해야지. 그러고나면 한국 퀴어 인권 운동사 3부작(퀴어락 역사, 트랜스 운동사, 전해성 아카이브 분석) 작업을 위한 뭔가를 해야지. 원래 3부작은 올해 작업할 예정이었는데, 지도교수의 중요한 조언을 들으니 그럴 필요가 없더라. 그래서 내년부터의 작업으로 바꿔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02

10년이나 걸리는 느린 속도. 이런 속도는, 칸트가 아니고서야, 확실히 성실성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최근 그래도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8~9월 두 달 동안 어떻게 보면 서울변방연극제와 얽혀 지냈는데, 9월 중순에는 안산시 고잔동에서 진행한 <어서오세요>라는 연극/공연을 봤다. 그 내용은 세월호 참사 유족, 이태원 참사 유족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이었다(이야기만 듣는 것은 아니고 연극적, 공연 형식의 장치가 존재했다). 여기에 장소의 맥락이 존재하는데, 세월호 참사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단원고 학생이었고, 단원고 희생자의 절반 정도가 고잔동 거주자였다. 그리고 <어서오세요>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 11주기가 지난 세월호 참가 유족의 이야기 중 이 블로그에서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은, 사람들이 계속 노란 리본이나 팔찌를 착용해주기를 바라는 요청이었다. (그날 울면서 H에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것을 어디까지 전파하고 공유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11년이면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 잊힐 수도 있고,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지만 그래도 노란 리본이나 팔찌 같은 애도의 굿즈를 이제는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더 오래, 더 계속 기억을 이어나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며칠 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12.3내란 이후의 광장과 관련한 책이 지난 봄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서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속도감. 사회적 참사와 관련해서도 이런 속도감은 중요한데 빠른 속도로 사안을 파악하고 참사를 애도하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무뎌질 1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하는 행위는, 사안과 기억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작업이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나처럼 늦게 슬퍼하고 늦게 화내지만 오래 지속하는 걸 잘 하는 경우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느린 속도라는 것이, 10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기보다 어떤 사건이나 질문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한 편의 글로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0년 정도 걸리는 것이 무어 그리 늦은 일이겠는가. 때로는 10년 정도 지나서야 비로소 관련 글을 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03

암튼 다음 논문 얼른 써야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