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아님을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 중.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릴 땐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십 대 후반부터 알러지성 비염을 앓곤 했다.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나가는 루인이지만 여름이면 어김없이 알러지성 비염에 몇 번은 종일 훌쩍거리며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작년엔 별 일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올해는 유난히 자주 비염이 도지고 있다. 후후. 아, 그렇다고 냉방병이 원인은 아니다. 에어컨 없는 집에서 살았고 지금도 에어컨은 쓰지 않고 있으니까. 여름 특유의 어떤 미세먼지에 더 예민한가 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기냐고 물을 때 마다 말하고 있다.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어요.”라던가 “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어요.”라고. 속담에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을 빗댄 것. 하지만 왜 여기서 개가 등장하는 걸까?
친밀한 의미로? 오랫동안 인간들과 함께 살아왔으니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엔 “개”를 비하하는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인간우월주의의 반영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를 포함하는 속담은 많고 그 속담들은 하나같이 “개”를 비하/열등의 의미로 불러들인다. “개만도 못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등등.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은 왜 나왔을까? 때론 그것의 의미가 지금에 와선 혹은 특정 누군가에겐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의 의미를, 지금의 루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속담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이것은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의 모든 뉘앙스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란 의미이며 언어의 의미 발생은 개인의 경험 맥락에 따라 다르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속담으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지만 결국 속담이란 것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속담이 등장할 것이란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인터넷용어인 “안구에 쓰나미”란 말은 끔찍하다. 비록 쓰나미가 곧장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사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해도 그때의 사건 이후로 쓰나미란 말이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이렇게 가볍게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이 당황스럽고 때로 무섭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은유로 만드는 것의 폭력을 고민하게 한다. 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란 표현처럼 은유가 성립하기 위해선 어떤 현상을 고정적이고 변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다른 해석을 배제하고 단일한 의미부여만 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박제한다. 박제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지워지고 박제하는 사람의 의도에 맞게 재구성하며 그리하여 그 말 속엔 더 이상 그 존재는 없다. 오직 “나”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비둘기는 평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이런 비유법이 오히려 비둘기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러지성 비염에 몸이 맹~하다. 으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