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딱히 새로 쓸 글이 없으면 예전에 쓴 발제문을 올리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 언제나 그렇듯 올리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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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
2006.11.29.
1. 협상하기
TV나 주간지, 일간지 등에서 읽을 수 있는 트랜스젠더 관련 인터뷰나 기사는 거의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두 개만 읽어도 될 정도이다. 일테면 어릴 때부터 얼마나 힘들었는지(하지만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소위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간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질문이며, “다른” 삶을 산다는 건 힘들며 “남들”처럼 사는 것이 무난하다고 가정하는 태도이다), 자신의 몸을 얼마나 혐오하는지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직장에서 쫓겨났다거나 몸의 일부를 도려내고 싶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1970년대 트랜스섹슈얼들을 “진단”한 의사들은 해리 벤자민이 제시한 트랜스섹슈얼의 정의/증세와 일치한다고 학회나 저널에 보고했다. 19세기 후반, 히스테리를 연구한 한 의사는 히스테리는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는 가설(假說)을 설정했는데, 그 가설을 발표한 이후 그와 상담한 모든 히스테리“여성”들이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쳤다. 짐작할 수 있듯, 미국의 트랜스섹슈얼들은 자신이 원하는 의료과정을 거치기 위해 매뉴얼대로 얘기했고(의사에게 가기 전에 예행연습도 했다고 한다), 히스테리“여성”들 역시 의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기에 가설대로 ‘무대에서 상연’했다고 한다.
질문자들이 인터뷰 과정에서 범하는 중요한 문제점 중 하나는, 질문자는 질문자로서의 위치에 있고 답변자는 답변자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질문자가 “연구자”일 경우엔 질문자는 답변자의 ‘경험’을 지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며 답변자는 “데이터”(“객관적인 사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인터뷰interview는 말 그대로 inter-view, 즉 상호 응시, 상호 관찰이라는 의미이다. 인터뷰는 질문자와 답변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답변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 역시 질문자로 설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는데, 다만 그 형식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란 형식을 통할 뿐이다. 즉, “질문자”가 구성하는 언어에 맞춰서 “답변자”는 대답할 언어를 구성하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야 상대가 수긍하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로 살면서 어떤 차별을 겪고 있나요?”란 질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요.”라고 답하는 건 ‘너는 나에게 얼마나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으니 이렇게 대답하겠다’ 혹은 ‘너는 내가 반드시 차별을 겪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구나’라는 뜻을 내포한다. 트랜스젠더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사회적인 승인이 있을 때, 트랜스젠더들은 거의 모두가 그런 “승인”에 맞춘 대답을 하기 마련이고 그렇게 말하지 않을 때에도 “승인”에 맞춘 내용만 받아들이고 활자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터뷰 자리가 아닐 때, 좀 더 ‘친밀한’ 사람들과 있을 때의 내용은 그것과 다른데 이 말은 어느 말은 진실이고 다른 말은 거짓이란 의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지 협상한다는 의미이다.
루인의 경우, 가급적 커밍아웃을 하며 사람들과 만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럼에도 커밍아웃을 하지 않고 있고 어쩌면 영영 하지 않을 집단이 있는데 이성애혈연가족들이 그 집단이다. 많은 퀴어들이 그러하듯, 커밍아웃을 한 곳에서의 행동과 하지 않은 곳에서의 행동 사이엔 상당한 “간극”이 있는데 루인은 루인의 젠더정체성을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모르는 공간일 경우, 상대방이 인식하는/요구하는 젠더로 행동하는데, 주민등록상의 성별이 1번이고 “아들”로 인지하는 가족체계에서 “남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좀 더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안’/‘덜’ 하는 편이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하는 행동들을 하는데 그렇다고 이것이 루인이 ‘트랜스젠더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트랜스젠더라는 걸 모르는 가족과 있을 때,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에서 같이 활동하는 운영위원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루인은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것일까(한편으론 그렇기도 하다). 혹은 전화기가 닿아 있는 부분은 트랜스젠더이고 나머지는 아닌가? 어떤 사람은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라고 밝히지 않는 건 기만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가 아닌’ 루인(의 행동)은 기만인가. 루인이 트랜스젠더란 걸 상대방이 알건 모르건 루인의 행동엔 별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같은’ 행동도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읽고 싶은 방식으로 해석하며 특정 젠더로 간주한다. 이런 “해석” 역시 루인‘의’ 기만인가.
2. 행위성
자신을 주장하는 것―“나는 트랜스젠더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자신을 단일한 정체성으로 고정하는 것은 아니다.
mtf 트랜스여성의 경우 트랜스여성이 아니라고 불리는 여성들보다 더욱더 여성‘스럽고’ “여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다른 사람들이 ‘여성임’을 승인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여성임이 부인되고 트랜스젠더/트랜스여성으로 각인된다.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한다. 예전에 잠깐 얘기를 나눈 한 CD는 크로스드레서들은 자주 ‘업’하지만 트랜스젠더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옷을 입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고 말한 반면 미디어나 어떤 누군가들을 통해 전해 듣는 얘기 속의 mtf/트랜스/여성은 이성애를 강화하는 행동과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행동한다. 하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부터 루인을 트랜스젠더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강호동”(이라는 사회문화적인 코드)을 “남성”이 아닌 다른 어떤 성으로 여기고 얘기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물론 반드시 루인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 앞에서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는 것, 어떤 장소에서 여성성을 ‘과잉’체화하는 것과 같은 행동은 그 상황에 따른 협상이다. 협상한다는 건,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담론 지형 내에서 어떻게 자신을 주장할 것인가, 하는 전략이며 그래서 맥락에 따라 “모순”처럼 여겨지는 행동(의사 앞에선 자신의 외부성기를 혐오한다고 말하고 친밀감을 형성한 관계와 있을 땐 자신의 외부성기가 주는 쾌락을 말하는)을 하기도 한다.
자신임을 주장한다는 건 자신을 본질적인 정체성/주체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 사회의 맥락에서 자신의 위치를 그리는 작업이며 이를 통해 사회의 담론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것을 행위성이라고 해석하는 데, 헤크만(Hekman 1995)의 지적처럼 행위성은 “긍정”적인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협상하는 행위면서 어떤 행동을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했는지를 읽는 작업이다.
3. “Inside/Out”-이분법을 드러내기
나마스테(Namaste 1994)는 푸코와 데리다의 논의를 통해 “내부/바깥”Inside/Out의 관계를 논하며 그것은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는 관계에 있음을 지적한다. 제도 바깥에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은 제도 내부에 있으며 “반대”라는 설정을 통해 “나”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내부/바깥”이란 구분은 그 자체로 이분법인 동시에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는 걸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 구조는 이런 식의 구분 그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존재들을 원천 배제한다.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식의 설명은 양성애, 트랜스젠더, 간성, 퀴어 등을 ‘존재하지만 부재중’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나마스테는 이런 이분법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푸코를 읽으며, 결국은 허무주의로 빠져서 죽음 외엔 저항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저항조차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이 저항 불가능성을 얘기한다고 해석한 듯 하다. 하지만 저항이 기존의 담론 구조 내에서 발생한다는 말은, 한편으론 저항 행위 자체가 저항하려는 대상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공고히 하는 행동임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만큼 지배담론이란 것이 취약하고 틈이 많음을 의미한다. 푸코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 있다고 해서 단 하나의 담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담론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크만이 모색하고, 나마스테가 말하는 저항의 공간은, 담론과는 무관한 바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담론의 틈, 담론들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균열지점들이다.
“여성성”/“남성성”을 과잉체화해야만 비로소 “진짜”라고 승인하지만 그 승인이 역설적으로 부인/부정(“그러니까 넌 트랜스야”)을 의미하고, 자신을 주장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신을 부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는 건, 담론의 틈, 균열지점을 체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회제도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저항 아님”, “행위성 없음”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가장 순종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 행동이 가장 저항적인 행동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루인, “젠더를 둘러싼 경합들(gender dysphoria):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여/성이론> 15호 (서울: 도서출판 여이연, 2006)
푸코, 미셸, <성의 역사: 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서울: 나남, 1990)
Bartky, Sandra Lee, “Agency: What’s the Problem?” in Judith Kegan Gardiner ed. Provoking Agents: Gender and Agency in Theory and Practice (Urbana and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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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dt, Gilbert, “Mistaken Gender: 5-Alpha Reductase Hermaphroditism and Biological Reductionism in Sexual Identity Reconsidered”, American Anthropologist, New Series, Vol. 92, No. 2 (Jun., 1990)
Namaste, Ki, “The Politics of Inside/Out: Queer Theory, Poststructuralism, and a Sociological Approach to Sexuality”, Sociological Theory Vol. 12, No. 2 (Jul.,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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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이라고 간주하는 행동’을 덜.. 어려서는 덜 했던 것 같은데 행위성에 위해 제사나 명절날 잘 과잉체화하는 것 같습니다. ㅜ.ㅜ 하기 싫은데 하는.. 친척 어른들은 시집가야 한다고, 살림을 잘한다고 하지만 속은 모르고 하는 얘기죠. 쿡~ 하는 짓이 홀아비 스타일이라고 어머니는 간파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설거지를 잘 하고 빨래를 잘 하는 모습에 그저 살림을 잘 하다고 말을 하니.. 분명 하기 싫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생하는 부모님 생각에 나이가 든 제 위치 생각에.. ‘덜’이 아닌 ‘잘’하고 있는, 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정말 싫어요. 어렸을때 커서 내가 저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찔했었는데.. ㅡ,.ㅡ
사실 이 글을 쓰고 나서 표현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 ‘덜’ 한다고 하기보다는 부모님과 있건 혼자 있건 행동에 별 차이가 없는데 다들 자기 편한데로 해석하다라고요. 푸훗.
그나저나 하기 싫은 행동을 억지로 해야하는 것 만큼 싫고 “아찔”한 것도 없는 거 같아요. ㅜ_ㅡ
루인글을 어떤 때는 무쟈게 코믹하고 어떤 때는 죵늬 우울이 뚝뚝 묻어나고 또 어떤 때는 죵늬 시니컬하고 또 어떤 때는 죵늬 음침하다? 키킥♪ 오늘은 뭔가, 이 글 읽으면서 자꾸 만화컷이 떠오르는데, 의사의 진단을 받는 ‘환자’가 진찰 끝에, “이렇게 말해주면 되는 거냐?” 라고 말하는 장면? ㅎㅎ근데 난 참 그래. 그런 틈에 대해 말하는 걸 죵늬 못견뎌하는 사람일수록, 그래서 고깟 틈으로 너네가 뭘 어쩌겠냐, 라는 태도를 하기도 하던데..흐음. 어쩐지, 거룩한 계보에서 벽 무너져내리는 게 떠오르기도 하고. 뭐 그런. 그나저나 참고문헌이 루인이 쓴 거랑 푸코 빼면 전부 꼬부랑글씨;; 예전에는 고 자체로 압박으로 다가왔는데, 우와- 루인은 죵늬 공부를 많이 한, ‘많이 아는 사람’이구나 뭐 그런. 지금 보니 웬지 노동자(학생)의 애환이 느껴진달까ㅎㅎ 다 재밌었지만 3번이 제일 재밌었엉ㅎㅎ 그러니까 조교실에 남은 귤은 루인이 먹게 해줄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참고문헌의 영어문헌들은 어떻게든, “루인도 공부해요!!”라고 무식함을 광고하는 거지요. 크크크. 원래 공부 안 하는 애들이 책가방만 무겁고 책장에 책만 많잖아요. 흐흐흐.
잘 읽었어요 🙂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