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업 커리 중에 “어떻게 해서 (한국 사람인 당신이) 북아프리카를 공부하게 되었느냐?”란 구절이 있다. 이 커리의 핵심이자 시작이 되는 질문이다. 루인에게 이 질문은 불편했는데, 저자가 이 질문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 아프리카 지역이나 남태평양의 어떤 섬을 연구할 때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 아프리칸-아메리칸이 흑인문화에 대해 연구 하지 않고 백인 중산층 문화에 대해 연구를 한다거나 비이성애자가 비이성애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는다거나 한국인이 브라질을 연구한다던가 하면 늘 상 이런 질문이 따라 붙는다.
이런 질문 자체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데 이런 질문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그로인해 쓰여 지는 글은 어떤 면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질문을 되묻기, 루인이 받았던 질문에 답을 궁리하며 몸앓았던 부분들이다. “어떻게 수학과면서 여성학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 자체가 사실, 루인에겐 상당히 낯선데, 루인에겐 수학과 여성학을 같이 공부하는 것이 별 다른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어떻게 대답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질문 자체를 되물으면서-“왜 수학과 여성학을 함께 공부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죠?”-전혀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질문자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위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보게끔 하는 방법이다. 질문을 바꾸지 않았다면 수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질문자들의 편견, 근대에 생성된 분과학문, 한국의 교육제도, 수학/여성학과 성별(여기선 성별gender이다) 등등에 대해 몸앓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해도 현재와는 달랐을 듯 하다.)
오늘 수업 커리의 저자가 글을 못 썼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질문 자체를 다시 되물었다면 완전히 다른 글이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