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만 내려가는 부산이고 그래서 부산에 가면 그저 집에만 머물 따름이지만 그래도 어떤 날은 목적 없는 외출을 하곤 하던 몇 해 전. 그렇게 찾은 곳 중엔 어릴 때, 대략 3살 즈음부터 6살 정도까지 살던 곳을 찾은 적이 있다. 기억 속에 그곳은 상당히 넓고 큰 동네였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너무도 넓었다. 익숙한 반응일 수밖에 없지만, 20년 정도 지나 다시 찾은 그곳은 너무도 작고 좁았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몇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곳이었고, 그렇게 넓게만 느낀 골목길들도 좁아서 “성인 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가 부딪힐 것만 같은” 골목이었다.
기억이란 건, 이런 식이다. 당시의 몸이 경험한 걸 현재의 몸과 동일한 것으로 유지하려 하고, 때론 현재의 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4살 정도의 몸이 느끼는 동네의 규모는 20살 정도의 몸이 느끼는 동네의 규모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 동네는 언제나 크고 넓은 곳이라고 기억했다. (루인의 기억 속에 그 동네는 오정희의 소설 [새]에 나오는 곳과 비슷했다. 물론 오정희의 소설 속의 공간이 루인이 기억하는 공간과 같을 리 없지만, [새]를 읽으며 두 곳이 너무도 비슷하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새]에 나오는 공간이 너무 매력적이라 기억 속의 공간을 [새]의 공간으로 바꾼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억 속의 공간으로 그 동네를 유지하기 위해선, 그곳이 언제까지나 기억 속의 그곳이기 위해선, 그 동네는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확장 공사를 해야 한다. 지금 루인의 몸 크기에 맞춰 골목길의 크기, 담벼락의 높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너비까지,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만, 20대의 루인이 기억하는 그 동네가 어릴 때의 그곳과 같은 곳일 수 있다.
종종 어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변하지 않고 여기서 기다릴게”라는 구절들. 처음엔 이런 구절들이 변하지 않음, 자신을 당신의 기억에 맞춰 고착시키는 행위라고 느꼈다. 그래서 한 편으론 좋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별로 안 좋아했다. 당신이 낯설지 않도록 그 모습 그대로 기다린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며, 헤어졌을 때 혹은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혹은 당신이 내게서 보고 싶어 한 모습으로 박제해서 살겠다는 의미로 간주했다. 하지만, 당신의 기억이 변하는데, 내가 살아가는 세월이 흐르는데 어떻게 그대로 지낼 수 있겠어.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당신이 익숙한 모습으로 기다릴게, 라는 말은 나를 박제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당신의 기억이 변하는 속도에 맞춰 나도 열심히 변하겠다는 의미이다. 만약 당신이 나를 똑똑한 사람으로 기억한다면, 지금 상태로 있어선 안 될 일이다. 10년 뒤에 만나도 여전히 똑똑한 사람이란 이미지로 남기 위해선, 그 시간 동안 상당히 변해야 한다.
결국, 어떻게든 변하지만, 그런 변화의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변하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억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도 있어야 하고. 상대방은 나의 이런 모습을 기억할 거야, 라는 (과거)예측과 상대방이 내게 바라는/기억하는 모습 사이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도 안 변했다”라는 말과 “상당히 변했네”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어떤 식으로 변했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다를 뿐.
“내가 여기 있음을 기억해줘.” 하지만 이 말은, 그저 기억이라도 해 달라는 간절한 염원이기도 하다. 기억이 변(색)하는 세월 속에서, 어떤 형태가 되었건 기억이라도 해달라는 간절함. 그 소박한 것 같으면서도 무거운 바람. 그러면서도 어떤 형태로 기억해달라는 요구. 이런 여러 몸들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고, 그래서 유난히 아프고도 절실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들키지 않고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우연히 마주친다…? 🙂 들키지 않고가 아니라 맞닥뜨림이 되겠지만요. ㅎㅎ 10년이란 시간, 그리 길지 않던데요. 🙂
왜인지 ‘간빠레’라고 말하고 싶은.. 끝문장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예요. 쿡~
흐흐. 고마워요 🙂
그나저나 비공개 댓글 표시를 보자마자, 와앗, 하며 설레는 느낌으로 확인했는데, 그 느낌이 맞아서 좋아하고 있어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