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의 경우, 술을 마신 적이 없으니 “필름이 끊기다”가 어떤 느낌인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라디오에서 필름 끊긴 경험을 둘러싼 얘기가 나오면 낄낄,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때의 느낌을 짐작만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필름 끊긴 다음 날의 일화들이다. 언제까지 술을 마셨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거나 다음날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 아픈 머리와 쓰린 속을 붙잡고 있는데, 그땐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데, 저녁 즈음, 갑자기 전날 기억이 퍼뜩, 퍼뜩 떠오르기 시작할 때. 그것도 모든 장면이 다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만 떠오를 때. 혹은 며칠 후 같이 술 마신 사람들을 만나는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할 때, 그런데도 무슨 이유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럴 때가 가장 당황스럽다고 얘기했다.
김밥을 사러 나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기억을 지우는 기술을 상상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지우고 싶은 특정 기억만 지우기. 물론 이런 건 몇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다. 한편으론, 현재 알려진 기술로는 안 된다는 것(“알려진” 기술로는 안 된다는 말이며, 그러니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론, 만약 내가 2000년 7월 어느 날의 기억을 지우겠다고 하면, 단지 그때의 기억만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경험 혹은 기억이란 게 특정 순간에만 일어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기에 특정 순간만 지운다고 없앨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원하는 순간만 지울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 루인은 기억을 지우고 싶을까? 지운다면 언제를 지울까? 라는 고민을 했지만, 이런 고민은 1초를 넘기지 못했다. 지우고 싶지 않았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가 더 무섭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하는 건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어느 순간, 퍼뜩 떠오르는 과거의 어느 순간이다. 혹은 도무지 한 적이 없는데 남들은 했다고 말하는 일들이거나. 정말 어느 시기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서 지웠다고 했을 때, 어떻게 될까? 만약 일년 전 어느 날의 기억들을 모두 지웠는데, 그 기억과 관련된 사람이 나타나서 아는 척 하고, 그 일을 얘기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 한 사람이라면,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며 넘어가겠지만, 만약 여러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면, 그 사람들 중엔 낯선 사람도 있지만, 믿을 만한 사람도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내가 그 일을 했다고 얘기하기 시작하고, 내 기억 속에 그 일은 전혀 없어 도무지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일을 나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고등학생 시절, “이성애”혈연가족들과 살 때, 엄마님은 루인의 어린 시절을 얘기해 줬다. 워낙 개구쟁이라서 갖은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말과 함께 들려준 일화는 두부. 네댓 살 무렵 살던 동네엔 두부는 물론 생선, 어패류 등등을 팔던 가게가 있었다. 루인은 워낙 장난이 심해서, 그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선, 손가락으로 두부를 콕콕 찌르며 구멍을 내고 있었다나. 가게 주인에게 혼나고 결국 집에선 팔 수 없게 된 두부들을 다 사야했다고. 그렇게 혼났으면 그만 둘 법 한데 또 어느 날은 커다란 홍합을 쿡쿡, 찌르다가 홍합이 입을 다무는 덕분에 동네 떠나가라 울었다고. 그리고 나서야 이런 일을 그만 두었다고.
엄마님은 이런 얘기를 했고, 같이 있던 ps도 기억난다며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했지만, 정작 루인의 기억 속에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그 일은 떠오르지 않고. 그래서 그땐 이 말이 마치 거짓으로 꾸며낸 일이라고 여겼고, 억울했다. 한 적도 없는 일들을 루인이 했다고 말하고 주변 사람들이 정말 그랬다며 몰아가기 시작할 때, 억울하지만 항변할 길도 없었다. 물론 지금은 이 에피소드를 낄낄 웃으며 말하고, 개구쟁이 기질이 농후한 루인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비록 지금이야 이 에피소드를 좋아하고 그래서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루인이 경험한 일로, 루인의 생애사에 편입시키고 있지만, 그 말을 들을 당시엔 억울했다.
바로 이 지점, 어느 날의 기억을 지웠는데, 그래서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데, 주변 사람들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이 말해주는 방식으로 나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일을 내가 “경험”한 일로 구성해야 할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악의를 가지고 루인에게 루인이 정말로 한 적이 없는 일을 했다고 말하며, 루인의 경험을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와 앨리스]가 대충 이런 상황이기도 하다. 흐흐.)이런 고민이 떠올라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런 바람-기억을 지울 수 있는 순간이 와도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바람의 이면엔 마치 지금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것만 경험했다는 식의 믿음이 있다. 세월 속에서 모든 걸 기억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래서 기억을 지운 적이 없다고(자연망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계 조작에 의한 망각) 믿음에도 “그때 그러지 않았느냐”란 말에 당황한다. 인면맹인 루인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낯설기도 한데.
“기억의 왕 푸네스”는 행복할까? 몇 월 몇 시 몇 초에 일어난 일도 다 기억하고 있다는 푸네스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느 날, 침대에 누운 푸네스는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순간을 회상하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가 기억을 회상하기로 한 순간이 20살을 채우고 21살로 넘어가는 그 1초의 순간이라면, 그가 모든 기억을 다 회상하기까지는 20년이 걸리고 그러니 40살을 가득 채우는 순간에야 비로소 회상은 끝난다. 그 마지막 장면은 기억을 회상하겠다고 다짐한 순간일 테다. 그렇다면 40살을 채우고 41살로 넘어가는 1초의 순간부터 그는 무엇을 기억할까? 태어난 순간을 기억할까?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21살의 자신을 기억할까? 태어난 순간과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는 21살의 자신을 동시에 기억할까? 이런 순환을 반복해서 61로 넘어가는 1초가 되는 순간 그는 무엇을 기억할까? 여전히 태어난 순간을 기억할까? 태어난 순간과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는 21살과 이 순간들을 동시에 기억하고 있는 41살을 동시에 기억할까? 그의 기억 회상은 언제 중단할 수 있을까? 중단이 가능할까? …이런 상상을 동시에 하고 있다.
필름이 끊긴 적이 없으시다니;; 축복 받으신 겁니다. -_-;;
그 다음날의 죽고싶은 난감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젠 그래서 술앞에서 객기는 삼가게 되더군요 ㅎㅎ 세월의 주는 망각은 대개 기특하지만, 술이 주는 망각은 망신스럽습니다 흑..
오오, 라니님도 필름 끊긴 적이 있으신가요?
루인은 술을 전혀 안 마시기에 술자리에 가면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흐흐. 남들은 술 안 마시면 무슨 재미냐고 하지만, 그 분위기 자체가 재밌을 수도 있고, 술에 취해가는 사람들 관찰하는 재미도 있고요.. 흐흐흐
갑자기 불쑥 솟아오르는 기억이 말이죠.. 때론 정말 처치곤란이에요. ㅋ 저는 필름 끊겨본적 있는데(딱 한번) 그때 이후로 절대 곤드레만드레하게 마시지 않아요. ㅋㅋㅋ 다음날 주변에서 들려주는 얘기를 듣고있기가 너무 괴로운거있죠 캬캬캬 정녕 내가 그랬단 말인가 하면서 ㅋㅋ
헉.. 정말 난감할 것 같아요. 크크.
그나저나 필름이 끊긴 다음 날의 상황은 정말 파장이 큰가 봐요. 위에 라니님도 그렇고, 그 다음부터는 술을 적정선에서 삼가는 걸 보면요.. 흐흐
그 동안 못 읽은 글이 산더미;; 차근 차근 읽어야겠어요~ 뜬금없는 뒷북 댓글이 달려도 놀라지 마시길..^^;
근데 루인님 글 회사에서 rss로 읽으려고 했더니 한 줄밖에 안 나와요.. 전체공개로 하실 수는 없나요? ㅜㅜ
지난 글을 읽어주신다면, 오히려 루인이 고마운걸요. 🙂
전체공개는… 흑… 지금 바꿀게요. 흐흐 🙂
고마워요~ 회사에서 어제 오후부턴가 읽히길래 바꾸셨나보다 했어요. 기뻐라 ㅠㅠ
rss로는 읽을 수 있다니 다행이에요. 다른 한 편으론 영광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