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임밸류라는 거, 학벌이라는 거, 학력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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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가짜 영어 신데렐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의 시즌2(-_-;;;)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지렁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 단체의 한 활동가는 이번 기회에 단체 이름을 바꾸라고, “지렁이”를 빼라는 얘길 했다. 사실 그 활동가가 단체 이름에 “지렁이”를 빼라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단체 발족을 준비하던 시기에도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이렇게만 적으면 그 활동가의 이런 말이, 지렁이가 발족하기 전부터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간섭하려는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니다. 그 활동가 역시, 자신들의 단체이름으로 인한 “곤란함”을 겪었기에 해주는, 조언이었다. 그럼에도 지렁이는 여전히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로 발족했다.

만약 활동가 단체들이 모인 포럼이 아니라, 소위 학교의 이름을 통해 “학술포럼”이라고 불리는 곳에 루인이 초대받았다고 치자. 그때 루인을 소개하는 소속을 어떻게 기재할 것인가는 루인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된다. 대학원생으로 소개할 때와 단체 활동가로 소개할 때 루인의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대학이냐에 따라서, 단체명이 어떤가에 따라서도 상당히 다르고. 루인을 소개할 때, 한국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명문대 “한국대학교”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하는 것과 영화에서조차 이름이 없는 “3류 대학교” 대학원생이라고 소개하는 것 사이엔 상당히 다른 반응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을 대학원생 혹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연구자로 소개하는 것과 단체 활동가로 소개하는 것 역시 많이 다르다(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단체 활동도 하는 교수들도 단체이름보다는 모 대학 교수라고 먼저 소개하거나 대학교수란 직함에 방점을 더 찍는다). [루인에게 이런 고민이 가능한 건, 어쨌거나 루인에겐 대학원생이란 학력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선택할 학력자본이 있기에 이런 갈등을 하는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고민은 “학력과시”로 읽힐 수 있음을 안다.]

단체 활동가로 소개할 때에도 단체 이름은 그 사람의 말에 다른 무게를 준다. 루인을 소개하면서, “성전환자인권연대” 활동가로 소개하는 것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활동가로 소개하는 건 전혀 다른 의미이다. “지렁이”가 붙는 순간, 학술포럼에선 “격이 떨어진다”는 것. 즉, 루인을 “성전환자인권연대 산하 젠더이론및정책연구소 연구원”(낄낄낄 -_-;;)이란 식으로 소개한다면 사람들이 루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

“지렁이”란 이름을 빼라고 말한 그 활동가는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 단체 활동가들 역시 이런 문제를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해도 단체이름으로 소개할 때와 어느 대학의 박사과정으로 소개할 때,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고 분개하곤 했다. 포럼에서 단체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발표를 하면, 소위 교수나 학교의 연구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네가 아직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란 식으로 반응한다며. 학교가 아니라 단체이름으로 소개할 때에도, “○○정책개발연구소”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의 말에 더 집중하고.

어쩌다보니 지렁이 활동가 중, 루인의 명함에만 “학술정책팀장”이란 직함이 적혀있는데(*부들부들* 하지만 루인의 잘못이었다는 거-_-;;), 다른 누군가와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 루인의 명함을 주면, 바로 이 직함 때문에 반응이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니 단체 이름이나 소속에 따라 사람들이 얼마나 다르게 반응할 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최근 신정아씨에 이어,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으며 심란한 몸이다. 비록 학력을 거짓으로 얘기한 것이 잘못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비난 받을 일인지,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중도하차를 운운할 만큼의 큰일인가 싶기도 하다. 이지영씨가 처음부터 자신을 고졸이라고 얘기했다면 “연세대 외국어학당과 이익훈 어학원”에서 영어강의를 할 수 있었고 “‘굿모닝 팝스’의 진행자”로 발탁될 수 있었을까? 글쎄.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학벌과 학력이 중요한 판단기준인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네임밸류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학력을 허위기재하는 일이 발생하는 건데. 그래서 “청취자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라고 말하며 분개하는 반응은, “단순히 거짓말”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도 아닌 “학력”을 허위조작해서 분개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정치권력의 정점이라고 일컫는 대통령도 고졸이란 이유로 무시 받으니 오죽하랴. 그래서 이번 일련의 일들은, 단지 허위기재라는 “거짓말”이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이 실력에 선행한다는 걸 드러내는 일로 느껴진다.

3 thoughts on “네임밸류라는 거, 학벌이라는 거, 학력이라는 거

  1. 저 역시도 사람들이 분개한 것은 *거짓말*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고졸* 출신의 사람들에게 열광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서가 아닐까 싶더군요. 신정아씨 사건도 뭐 비슷한 맥락에서 그렇고요. 전 사회가 학벌이나 간판에 목숨 걸게 만들어 놓고, 거기에 어쨌든 희생양이 된 사람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어떤 게 더 잘못 된 것인지를 모르는 게 아닐까 싶고요. 어쨌든 뭐 그 두 사람이 허위 학력을 기재한 것은 잘못이긴 하지만, 결국 사회가 다 그렇게 만든 거 아닐까요.

    1. 이번 일들이, 한국사회에서 학별과 학력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는데, 현재의 분위기로 봐선 요원한 거 같아요. 그래서 무척 아쉬워요.

  2. <요즘 각계 각층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허위 학력 문제가 큰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심지어 중국의 CCTV는 “한국 공인의 80%는 학력 위조를 했다’고 보도할 정도다. 한국 사회에서의 학력/학벌, 그 것이 지닌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돨까 싶어, 2005년 1월 5일자 중앙일보 (뉴욕판)에 발표했던 글을 여기에 다시 싣는다.>

    ‘초졸의원’과 학벌사회

    그 (이 상락)는 너무나 가난했다. 그래서 학교엘 못 다녔다. 겨우 초등 학교를 마친 후, 곧장 생활 전선에 나서야 했다. 노점상, 목수, 포장마차, 밑바닥 인생이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했다.
    그러다가 빈민 운동에 뛰어 들었다. 이 때 얻은 별명이 ‘거지 대왕’, 그 ‘거지 대왕’은 똘마니들에게 한컷 폼을 잡느냐고 악의없는‘거짓말’을 했다. “나는 이래뵈도 고등학교를 나왔다구~”

    그 ‘거지 대왕’이 지난 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금배지를 달았다. 시대의 바뀜을 보여주는 한 상징이었다. 당당히 39.2%의 득표를 했다. 시의원, 도의원 세 번을 거쳐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진력하는 사람”, “의정 활동에 너무나 성실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인물평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허위 학력 /고교 졸업장 위조 혐의로 금배지를 떼이고 감옥엘 갔다. “피고인이 학력을 속인 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교 졸업 증명서를 TV 토론에서 제시하는 등 죄질이 불량해 엄정한 처벌이 요구된다”, 판결문의 요지다.

    자, 우리는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선, “이제 공인은 눈꼽만치의 거짓 말도 용납치 못한다”는 사법부 판결을 두 손 들어 환영한다. 거짓 말을 떡 먹듯하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 경우, 그의 악의없는 이 거짓말이 그 누구에게 얼마만한 피해를 주었을까? 상대 후보에게? 아니면 유권자에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가 얻은 표는 결코 그의 학력을 보고 던진 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작 “고교를 졸업했다”는 거짓말이, 진정 “죄질 불량…엄정 처벌” 대상이고, “금 배지 박탈…1년 징역”감이 될 것인가?

    고개가 갸웃둥 해진다. 물론 그는 실정법을 위반했다. 그런데 그 위반 사항이 겨우 ‘고교 졸업’ 행세다. 국/내외 석/박사 고학력이 넘쳐나는 사회, 그들이 보기엔 참으로 웃으꽝스런 학력 과시다.

    여기서 필자는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가치 척도의 다름을 새삼 확인한다. 배운 자에겐 별 것도 아닌 일이, 못 배운 사람들에겐 생애를 몽땅 앗아가는 이 가치의 다름, 그러면 한국같이 학벌이 일종의 패권주의가 되어있는 사회에서 못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선 안된다 (must not)”고 처벌을 일삼는 법만으로써는 이 세상은 너무나 살벌해 진다. 그리해서 미/일등 여러 나라엔 법을 뛰어 넘어 사람들에게 도덕/윤리적인 의무를 강요하는 ‘착한 사마리안인 법 (the Good Samaritan Law)’이란 것이 있다.

    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법을 넘어선 인정이고, 동정심이고, 약자에 대한 배려다. 그리고 배워서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아는 힘 (knowledge’s power)’을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만치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 삶의 터전에서 숱한 불이익 (disadvantage)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느 만치 바쳐ㅇ/ㅑ/ 한다. 그것은 마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사회 정의를 위해 그 부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당위와 맥을 같이 한다. ‘참 지식인’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다.

    이에 비추어, ‘고졸 행세-금배지 박탈-1년 징역’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한국 의 법체계가 대륙법/ 실정법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법관들이 진정 ‘참 지식인’ 었다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죄질 불량…엄벌 대상이나…피고가 지금까지 살아 온 생애의 정상을 참작…국회 의원 재임 기간 중에 반드시 고등 학교 과정을 이수토록 하라”.

    이런 멋진 판결이 나왔다면, 군사 독재 시절 시국 사범에 대해 외부에서 날아 오는 ‘형량 쪽지’를 보고, 거기에 적힌대로 “징역 1년, 2년, 3년…” 꼭두각시 판결을 했던 사법부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으리라.
    (추기: 국회의원 웹사이트 명단에 그의 학력은 “독학”으로 되어있다.)

    <장동만: e-랜서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뉴욕판) 01/05/05 일자>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아, 멋진 새 한국”(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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